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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3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37) 일명 '스타제조기'

내 영화역사에서 80년대는 '황금기' 였다.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이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80년대 말을 장식한 영화가 '아다다' (87년) 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89년) 두 작품이다.

'씨받이' 에서 절정을 이룬 해외에서의 평가가 이 두작품을 계기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중 '아다다' 는 주인공 신혜수에게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강수연에 이어 국제영화제의 두번째 쾌거였다.

당시만해도 신혜수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배역의 소박함과 순수함 때문에 그녀를 택했다.

일부 스태프들이 "촬영 도중 외국을 다녀오니 배우를 바꾸자" 는 이야기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끝까지 신혜수를 고집했다.

내 선견지명이 적중했는지 '아다다' 는 몬트리올영화제의 본선을 무난히 통과했다.

'씨받이' 때와 달리 나는 신혜수를 우리 일행에 동행시켰다.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영화진흥공사 김동호 사장도 직접 참가했다.

현지 공관원과 교민들의 협조로 우리 일행은 마음편히 영화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신혜수가 큰 일을 해냈다.

그때부터 내게 '스타제조기' 란 별명이 따라 붙었다.

'아다다' 는 계용묵의 원작소설을 윤삼육이 각색했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배금주의에 물든 현세태를 고발하고 싶었다.

결국은 돈때문에 팔려가 남편의 온갖 학대를 참다못해 물에 빠져 죽고마는 비련의 여인 아다다.

그 순수의 상징을 등장시켜 물욕에 가득차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한지일이 아다다의 못된 남편으로 출연했고 이경영이 이 작품을 통해 데뷔한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해외의 호평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의 내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아다다' 도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왜 흥행이 따르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해본 결과 그럴만도 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과도기' 란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60년대 저급취향의 작품을 만들다가 70년대 그 때를 벗고자 몸부림쳤다.

그리고 80년대. 주로 문예물 위주로 영화를 만들면서 예술지향에 대한 강박관념이 흥행성과는 역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영화적 완성도에 집중하다 보니 '재미' 란 것을 등한시 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제작자 또한 으레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홍보전략을 세우질 않은 것 또한 관객과 멀어지게 한 요인이었다.

여담이긴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다다' 를 통해 이전에 가졌던 공무원에 대한 선입견을 씻어내게 됐다는 점이다.

몬트리올영화제에서였다.

현지 공관원들의 열성적인 지원 덕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중심에 당시 영진공의 사장으로 있던 김동호씨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진공 사장 자리는 군인출신들이 대물림하던 자리였다.

새 영진공 사장으로 부임한 김동호씨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김사장은 드물게 문공부 출신인사였고, 막상 영화제가 열리는 현지에서 만나보니 영화에 대한 열성이 대단했다.

인맥도 두터워 그를 보고 찾아온 후배들이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와주려 달려들었다.

새벽 한두시까지 술을 마셔도 대여섯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영문 리포트를 작성하는 등 그야말로 '일벌레' 처럼 일에 매진했다.

그 당시 나는 관료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김사장과 현지 공관원들을 통해 그런 편견을 상당 부분 불식시킬 수 있었다.

그런 자기 희생정신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김사장 (현재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중) 은 이제 세계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거물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는 우리 영화계를 함께 걱정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몇 안되는 동반자 중의 한 사람이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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