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 지상 백일장] 초대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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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목련심경 (木蓮心經) - 정완영

하늘이 뜻이 있어 겨울 나무 가지 끝에

은밀히 빈자리를 마련하여 두시더니

봄날이 들기도 전에 꽃이 다녀갔습니다.

왜가리 같은 꽃이 무리무리 날아와서

사나흘 앓고 난 후 깃털 뽑아 흘려 놓고

천지간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덧없는 봄날이야 오는 듯 가버려도

꽃보다 고운 철이 잎철이라 하시면서

불현듯 피워낸 연초록 찰랑찰랑 넘칩니다.

□시작메모

어느 세월인들 세상 살아가기가 그리 쉬운 연대가 있었을까마는 요즘처럼 두려운 때는 일찍이 없었다.

날만 새면 세상 무너져내리는 소리. 그러기에 시마저 현실에 참여해야한다지만, 천만의 말씀. 현실이 시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25시' 의 작가 게오르규도 "시인이 괴로워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필시 이 말은 시가 없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말이었으리라. 병든 세상을 시말고 또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겠는가.

아무려나 이제 꽃철이 가고, 잎철이 문득 눈앞에 다가섰다.

사무치는 이 천지충만 앞에 서서 또 한 철 시를 생각해 볼 일이다.

□약력 ▶1919년 경북 김천 출생 ▶1962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조국' 으로 등단 ▶시조시인협회장.문인협회 이사 역임 ▶가람문학상.중앙시조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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