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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80> 우리술의 맛과 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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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주 제조명인 조정형씨가 술 내리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전주=프리랜서 오종찬

술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들어 있고, 문화와 풍토가 녹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술을 몸을 보(補)하는 음식인 약주라 부를 만큼 술을 즐겼습니다. 어느 동네, 어느 고장을 가건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전통술 하나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전통술은 민속주와 토속주로 구분합니다. 민속주는 무형 문화재나 식품명인이 만든 술을 말합니다. 토속주는 농민들이 지역에서 생산한 특산물을 원료로 해서 만들지요. 현재 민속주는 전국 50여 곳에서, 토속주는 150여 곳에서 생산합니다.

장대석 기자

[1] 전주 이강주

호남평야가 지척인 전북 전주에서 조선 중엽부터 제조되는 전통술이다. 소주에 배(梨)와 생강(薑)을 가미해 만들었다고 해서 이강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사회에서 즐겨 마시던 고급 약소주로 이름이 높았다.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 문답』에 따르면 이강주는 평양의 감홍로, 정읍의 죽력고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혔다.

백미로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과 누룩을 섞어 전통 방식으로 소주를 내린 뒤 배와 생강·울금·계피 등을 넣어 3개월 이상 숙성시킨다. 소주 고유의 향에 배의 청량감과 생강의 매콤한 맛, 독특한 계피향이 조화를 이뤄 은은한 향을 풍긴다. 술을 마신 뒤에도 뒤끝 없이 머리가 개운하며, 건강에 좋은 약재가 들어가 몸을 보한다. 담황색 색조가 풍치를 더해 술 색깔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은은해 선인들은 ‘여름밤의 서늘한 초승달 빛’으로 묘사했다. 무형문화재·명인으로 지정받은 조정형(69)씨가 집안에서 6대째 가양주로 내려오던 술을 되살려 그 맥을 잇고 있다. 063-212-5765

[2] 정읍 죽력고

매천 황현이 쓴 『오하기문』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 쌍치에서 일본군에 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서울로 압송될 때 죽력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기록이 있다. 독특한 이름의 이 술은 조선시대 출간된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도 나온다.

죽력은 대나무 토막을 항아리에 넣고 불을 지폈을 때 흘러내리는 기름이다. 한방에서는 중풍·해열·천식 치료에 쓰인다고 알려져 있다. 죽력고는 죽력에 솔잎·생강·창포 등을 넣고 소주를 내리는 방법으로 증류시켜 만든다. 세 번을 내리기 때문에 주조에 3주 정도가 걸린다. 술이 빨리 깨면서도 두통, 울렁거림 등의 숙취가 없으며 약술의 효험이 있다.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30여 년간 양조장을 운영해온 송명섭(53·무형문화재)씨가 어머니에게서 제조기법을 전수받아 2002년부터 생산하고 있다. 어머니는 동학혁명의 근거지였던 고부에서 한약방을 하던 할아버지에게서 죽력고 빚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063-534-4018

[3] 동래산성 막걸리

부산 동래산성 막걸리는 조선 초 특별한 소득이 없던 산성마을 주민들이 생계수단으로 누룩을 빚기 시작한 데서 비롯됐다. 숙종 32년(1706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금정산성을 쌓을 때 군졸들에게 주기 위해 이 누룩을 이용해 만든 쌀술이 산성막걸리다. 군졸들이 성을 다 쌓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맛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금정산성에서 만드는 누룩의 양에 따라 부산지역 곡물 값이 오르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산성막걸리는 전통 방법으로 만든다. 금정산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에 통밀을 굵게 갈아 피자 모양의 누룩을 만든다. 실내온도 48∼50도 누룩방에서 보름간 띄운다. 밀을 부셔 곰팡이를 띄우는 기간은 15일쯤 걸린다. 식힌 고두밥을 가루로 만든 뒤 띄운 누룩과 버무려 물과 섞어 발효탱크에 저장한다. 하루 정도 지나면 술이 되는데 완숙된 술을 거르려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 051-517-0202

[4] 합천 고가송주

경남 합천호가 한눈에 보이는 합천군 대병면 역평리 은진 송씨 고가에서 빚는 술이다. 송씨 고가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의 객사(客舍)인 사의정(四宜亭)이 있다. 고가송주는 찹쌀·솔잎·누룩으로 빚는다. 먼저 찹쌀 50되를 죽 끓여서 식힌 다음에 누룩 25되와 버무려 4일 발효시켜 밑술을 만든다. 이 밑술에 찹쌀고두밥 6가마(300되) 분량을 쪄서, 누룩 25되와 함께 넣고 덧술을 잡는다. 덧술을 두 달 동안 저온 발효시키면 술이 완성된다. 50되를 끓이려면 여섯 번 끓여야 한다. 솔잎을 넣고 찹쌀 고두밥 300되를 하려면, 한 솥에 20되를 찔 수 있으니 열다섯 번을 쪄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을 가마솥에서 끓이고 쪄낸다. 고두밥을 찌려면 마당에 솥을 하나 더 걸고, 이틀 동안 장작불을 지펴댄다. 고가송주는 60일간 저온 발효시킨다. 이 모든 과정은 6대 종부인 윤광주(73)씨가 맡고 있다. 055-933-7225

[5] 진도 홍주

전남 진도의 홍주(紅酒)는 소줏고리에서 내린 술을 잘게 썬 지초(芝草) 뿌리를 담은 삼베 주머니를 통과시켜 선홍빛 색을 낸 40도의 고도주다. 향이 은은하면서도 독특하고, 맛이 부드러워 미색향(美色香)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지초는 한방에서는 건위·강장·해독·해열과 항균 약재로 쓰인다.

홍국(紅麴·약술을 담그는 데 쓰인 누룩의 일종)으로 제조된 중국 원나라의 홍주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후 고려시대 말부터 홍국 대신 지초를 사용해 홍주를 빚은 것으로 보인다. 지초주(芝草酒)라고도 불렸다. 홍주가 진도에 전래된 것은 항몽 삼별초의 입도나 양반 유배인의 전수, 중국 남방 문물의 유입, 독자 발전 등으로 추정된다. 전남도 지정 문화재 제26호 전통주류로 지정돼 있다. 061-540-6363

[6] 영광 법주

굴비로 이름난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는 ‘토종’ ‘법주’라고 불리는 술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쌀로 술밥을 쪄 발효시킨 다음 증류하며, 알코올 도수 60도짜리까지 만들었다. 요즘은 40~48도짜리를 많이 뺀다. 마실 때는 목구멍이 확 달아오르지만, 마시고 나면 속이 편하고 뒤끝이 깨끗한 게 특징이다.

전형적인 가양주(家釀酒·집에서 담가 마시는 술) 단계에 머물러 대중화되지 못했다. 담그는 집의 분포가 영광군 전체에서 법성포로 좁아지더니, 집 수가 계속 줄어 현재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30년 이상 ‘토종’을 만들어온 이강명(67)씨는 “독주(毒酒)를 즐기거나 입소문으로 들은 사람들이 찾아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며 “토종을 안 마셔봤다면, 진정한 애주가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별 주문하면 찹쌀로 담가 주기도 한다. 061-350-5974

[7] 한산소곡주

감칠맛 나는 독특한 술맛 덕분에 ‘앉은뱅이 술’이란 애칭을 얻었다. 1500년 전 백제 왕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한국 전통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무왕 37년(635년) 3월에 조정 신하들과 부여 백마강 고란사 부근에서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가 멸망한 뒤 한산면 건지산 주류성(周留城) 주변에서 백제 유민들이 소곡주를 빚어 마시고 한을 달랬다고 한다. 이후 한산지역에서 명맥을 이어오다 우희열(72) 여사가 1997년 충남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받아 본격 시판했다. 우 여사의 아들 나장연(44)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규모를 확장했다.

18도의 전통약주와 이를 증류한 불소곡주(43도), 신세대 감각에 맞춘 백제 소곡주(13도) 등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찹쌀·전통누룩·우리콩·들국화 등을 원료로 만들어 100일 동안 숙성한다. 041-951-0290

[8] 계룡백일주

백일주의 원조는 ‘궁중술’이다. 1623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일등공신 중 한 명인 이귀(李貴·연안 이씨)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왕실 대대로 전해온 궁중술의 양조비법이었다. 이귀는 이 비법을 부인인 인동 장씨를 통해 이어가도록 했다. 이때부터 이 술은 연안 이씨 가문의 며느리를 통해 오늘까지 이어졌다. 술을 빚는 방법이 문헌 등에 나와 있지 않다. 며느리에서 며느리를 통해 ‘가문의 술’로 전수됐기 때문이다. 현재의 술은 연안 이씨 며느리인 지복남(지난해 작고)씨에 의해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지씨의 아들 이성우(50)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백일주는 16도짜리 ‘약주’와 40도짜리 등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약주는 찹쌀·누룩·재래종 국화꽃· 오미자·진달래·솔잎 등을 재료로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 숙성시켜 만든다. 마시면 신선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서 신선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예전에는 백일소주라고도 불렀다. 독하지만 솔잎과 국화꽃의 은은한 향이 있어 부드럽다. 041-853-8511

[9] 안동소주

안동의 맑은 물과 옥토에서 난 쌀을 주원료로 빚는 증류식 소주다. 그렇지만 일반 증류식과 달리 전통 기법으로 증류하면서 마시면 은은한 향취에 감칠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뒤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안동소주는 또 배앓이와 식욕부진, 소화불량, 독충에 물린 데 발라 치료하는 등 민간요법에도 사용돼 왔다. 안동소주의 시원은 원나라의 한반도 진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해 안동에 병참기지를 두었고, 당시에 소주가 전래됐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 권문세가 사이에 소주가 유행했으며,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 왔을 때 이 술을 진상했다. 안동소주는 1987년 경북도 무형문화재(제12호)로 지정됐으며 술 담그는 비법은 기능보유자인 조옥화(87) 여사가 전승해 직접 빚고 있다. 054-858-4541

[10] 김천 과하주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져 오다가 일제시대에 중단됐다. 단절 50여 년 만인 1984년 송재성씨가 시험 양조에 성공, 김천 명주의 맥을 이었다. 과하주는 1987년 경북도 무형문화재(제11호)로 지정됐다.

이 술은 경북 김천시 남산동에 있는 과하천의 맑은 샘물과 토종 찹쌀로 빚어진다. 다른 지방 사람이 김천에서 과하주 빚는 방법을 배워 똑같은 방법으로 빚어도 과하주의 맛과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금릉승람은 그 이유를 물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지금은 송재성씨의 아들 강호(70)씨가 기능보유자로 대를 이어 과하주를 빚고 있다. 과하주는 단맛에 신맛이 살짝 나는 담백한 술이다. 색깔은 암갈색이며 특유의 향이 있다. 손에 묻으면 끈적끈적할 만큼 진한 술로 숙취가 없는 게 특징이다. 찹쌀로 빚는 16도 발효주와 맵쌀 증류주 23도 두 종류가 있다. 054-436-4461

민속주 이렇게 만든다

① 밀을 깨끗이 씻어 말린 뒤 빻는다

② 물을 부어 반죽한다

③ 누룩틀에 담아 곰팡이씨, 효모씨를 앉혀 14~21일간 띄운다

④ 고두밥을 지어 누룩과 함께 섞는다

⑤ 항아리에 넣어 1~2주간 보관한다

⑥ 용수로 술을 떠낸다(청주,약주. ※용수로 받아내는 대신 소줏고리에

넣고 끓여 알코올 증기를 받아내면 소주가 된다)

⑦ 술독에 물을 붓고 찌꺼기를 걸러낸다(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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