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농아인 법정냉가슴…소매치기 연행 수화안통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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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특수절도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받은 한 농아인이 힘겨운 법정투쟁 끝에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내 장애인에게 높기만 한 법의 벽을 뚫었다.

지난해 6월 18일 오전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 김세식 (金世式.40.수화교사.경기도수원시권선구) 씨는 집으로 들이닥친 경찰관 4명에 의해 서울 성동경찰서로 연행됐다.

金씨의 혐의는 하루 전날 서울성동구마장동 J은행 앞길에서 돈을 찾아나오던 S씨의 2천만원을 날치기해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났다는 것. 金씨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말을 못하니 몸짓.손짓으로만 억울함을 호소했다.

경찰은 혐의를 시인하라고 다그쳤다.

金씨가 전과자란 사실은 경찰들에겐 큰 자신감을 주는 듯했다.

경찰은 金씨가 찍힌 은행 폐쇄회로 테이프를 들이대며 "은행엔 왜 갔느냐" 고 캐물었다.

피해자 S씨는 처음엔 "잘 기억이 안난다" 고 하다 폐쇄회로 테이프를 보더니 "金씨가 범인이 맞는 것 같다" 고 주장했다.

조사는 대부분 필담으로 진행됐고 金씨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될리 만무했다.

"상계동에 사는 전 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돈을 찾으려고 은행에 들렀으나 오토바이 운전은 못한다" 는 金씨의 주장은 묵살됐다.

金씨는 결국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돼 검찰로 넘겨졌다.

그러나 네번의 검찰 조사과정 중 수화 통역인이 등장한 건 단 한번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법적 지식이 없는 통역인은 金씨 답변 중 중요한 증거가 될 부분들을 많이 빼먹고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심 판결은 예상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징역 2년의 실형 - . 보다 못해 선배인 광명 에바다선교회 金재호 목사가 나섰다.

자신도 농아인인 金목사는 지난 대선 때 "수화통역 없는 후보연설은 위헌" 의 판정을 받아낸 임영화 (林榮和) 변호사를 선임했다.

林변호사는 우선 통역인을 대동하고 金씨의 주장을 경청했다.

수사와 재판기록을 복사해 金씨에게 보여준 뒤 金씨의 의견을 구했다.

허점은 금방 드러났다.

林변호사는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번복되는 논리적 모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지법 형사항소6부 (재판장 宋鎭賢부장판사) 는 "金씨가 은행 폐쇄회로 화면에 나왔다는 게 범인이라는 직접 증거가 될 수 없다" 며 무죄를 선고했다.

金씨는 지난주말 출소했다.

그는 "재판부에 감사드린다" 며 "장애인들이 법 앞에서 이중의 장애를 겪지 않도록 수사기관의 배려가 시급하다" 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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