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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봉사원 “척척 우리 김대장” 노래 주저없이 불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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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호 03면

평양시 낙랑구역 정성의학종합센터 동물실험실 건축 현장에서 북측 인사들과 함께 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인사들. 왼쪽부터 강영식 사무총장, 북측 관계자 두 사람 건너 구자상 부산경남본부 공동대표, 인명진 목사, 정여 스님, 리인수 부산경남본부 상임이사. 이들은 지난달 26~29일 방북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제공]

8월 27일 평양 시내 한 호텔의 식당. “척척 척척척 발걸음/ 우리 김대장 발걸음/ 2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앳된 여성 봉사원의 경쾌한 노랫소리를 듣는 남측 인사들의 표정이 상기됐다. 정부의 제한적 방북 허가 조치로, 어렵사리 평양을 찾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관계자들이다. 이 단체 상임 공동대표인 인명진 목사와 강영식 사무총장, 부산경남본부 상임대표인 정여 스님 등은 문득 김정일 위원장의 3남 정운에 대한 후계 문제가 궁금했다. 봉사원들에게 후계를 시사한 노래로 알려진 “ ‘발걸음’이란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한 봉사원은 불러볼 수 있느냐는 남측 인사들의 요청에 주저 없이 노래를 불렀다.

안보리 제재 두 달째, 8월 평양 풍경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한번 구르면/ 온 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척.” “2월의 기상 떨치며 앞으로 척척척/…/ 온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 2월 23일 노동신문 기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감상한 예술선전대의 연곡” 가운데 하나로 소개된 뒤, 대대적으로 보급된 ‘발걸음’은 후계 구축을 위한 대주민 선전용으로 파악돼 왔다. 9년 전 노동신문이 김정일 위원장을 ‘김대장’으로 지칭한 예가 있긴 하나, 이 노랫말의 맥락상 정운이 맞다는 게 우리 정부 내 관련 부서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정운이 ‘새로운’ 김대장으로 상징된다는 얘기다.

현장에 있던 한 인사가 봉사원들에게 “정운 후계 노래냐”고 물었더니 “글쎄요”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남측 방문단이 후계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자 북측 인사들이 정식으로 응했다. 그들은 이중의 메시지를 던졌다. “맞다. 맞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견해이고 비공식적 얘기다.” 이렇게 애매한 선을 그으면서 북측은 자신들의 입장을 수차례 전했다. “장군께서는 현재 굳건하시다. 굳건하게 계신다. 이것이 우리의 공식 입장이다.”

방북단 가운데 인명진 목사는 197080년대 민주화에 앞장선 인물로 재야권이지만, 이명박 정부에 쓴소리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친여 인사. 청와대 핵심 진영과도 수시로 소통하는 관계다. 늘 사전 교육을 받고 남측 방북단을 맞는 봉사원들이 ‘발걸음’ 노래를 부른 것이나, 후계 작업에 대한 겉과 속의 메시지를 모두 전해준 것을 두고, 의도적으로 우리 정부에 귀띔해준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후계 숨고르기 하는 듯”
6월 1일 국정원은 “북한 당국은 5월 말 정운의 후계 사실을 전 해외공관에 알리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올 초부터 ‘발걸음’, ‘사회주의 너를 사랑해’란 노래 보급으로 3대 세습에 대한 대민 정지작업을 은근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해 나갔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특히 발걸음은 예술선전대의 남성 중창, 남녀혼성중창, 합창 등 다양한 형태로 연주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7월 중순부터 북한 매체에서 ‘발걸음’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보도도 중단됐다. 정부 소식통은 “백두의 혈통일가, 주체혈통 등 정운의 ‘후계 코드’형 언급도 뚝 끊어졌다”고 말했다. 7월 중순은 김 위원장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8월 4일), 건재한 모습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면서 대미·대남 유화 공세로 진입하기 전 시기다. 대북 소식지인 ‘좋은 벗들’도 지난 3일 비슷한 소식을 전했다. 노동당이 7월, 각 성과 중앙기관에 후계자 문제에 대한 발언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내용으로, ‘현재 위대한 장군님께서 혈기왕성하시고 현지지도 사업을 정력적으로 하고 계시며 앞으로 10년 이상은 끄떡없이 나라의 정사를 볼 수 있으니 후계자 발언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북측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인사들에게 전한 메시지와 비슷하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권력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김 위원장이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호흡을 조절해가며 후계 작업을 하려는 차원”으로 분석했다. 핵문제를 둘러싸고 일합을 겨뤄야 할 상황에서 여유를 갖고, 대미·대남전을 수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후계 문제가 급부상한 뒤 북한 권력 내 힘의 쏠림 현상이 생김에 따라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5월보다 어두워진 평양의 밤
이번 방문단은 지난달 22일 북한이 특사조문단을 보낸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찾은 남측 인사들이다. 북한 측은 이들에게 상당한 실망감과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의 결단으로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유씨를 풀어주고, 특사조문단을 보내 이명박 대통령까지 예방했는데, 남측은 왜 달라진 게 없느냐”는 것이다. “남측 단체들의 방북과 지원 물량이 획기적으로 늘고, 남측 정부가 이런저런 제안을 해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는 얘기도 했다. 북한의 입장을 비공식 대변해온 조선신보도 4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과, 북한 특사조문단의 서울 방문은 ‘8월의 사변’으로, 남한 실용정부의 전략적 결단을 촉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미, 남북 관계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조선반도의 대립적 구도가 청산된다”며 통미봉남이 아닌 남북· 북미 관계 동시 개선 입장을 시사하기도 했다. 정부는 지난 4월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인도지원단체의 방북을 제한해 왔고, 최근에는 1주일에 두 단체 정도의 방북만 허가하고 있다. 단체들이 보내는 지원물품도 인천항구에 몇 달째 묶여 있다.

“석 달 전보다 평양의 밤거리가 굉장히 어두워진 것 같았다.” 지난 5월 북한의 핵실험 직전, 평양을 찾았던 인 목사는 어려워진 평양의 경제사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강영식 사무총장도 “평양시 구역별로 돌아가며 정전을 실시하고 있었다”면서 “식량 사정도 어려워 보였는데,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먹혀들어가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인 목사는 “북측 관계자들은 올해 서쪽 지역은 가물었고 동쪽 지역은 냉해로 농사 작황이 아주 좋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는데, 우리가 봐도 평양 근교의 벼들이 부실해 보였다”고 했다. 대북 물품 지원이 끊어지면서, 폐허가 돼가는 기존의 사업 현장도 적지 않았다.

인명진 목사 “인도적 지원은 해야”방북단 일행은 10만 명이 참가하는 북한의 대규모 집단체조 ‘아리랑’도 관람했다. 일행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전투 장면이 줄었고, 핵과 미사일, 로켓 발사 등 북한이 행한 최근 일련의 도발을 형상화한 공연은 없었다”고 했다. 대신 예술성을 높이고, 화려한 분위기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재구성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공연 현장에는 50명의 미국인 관광객을 비롯, 중국과 영국에서온 관광객 200~300명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5일 “북한이 당초 이달 말까지 공연할 예정이었던 아리랑 공연을 다음 달 17일까지 연장한다고 미국 내 북한 관광 전문여행사에 알려왔다”고 보도했다.

이번 방북 팀은 북측 인사와 만났을 때 “남북한이 진지한 대화를 하려면 경제 협력 문제를 넘어서 핵문제도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한다. 핵문제 논의 없는 남북 대화 진전은 이 정부에선 힘들다”는 기류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명진 목사는 “우리 정부가 북핵 문제를 확고하게 짚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은 별개로 다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일부 대북 지원 단체들이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북한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 측면도 있고 이는 분명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 인 목사는 “평양 거리에서 ‘대한적십자사’라고 적힌 쌀자루에 물건을 담아 리어카를 끄는 여성을 봤는데, 주민들은 배고픔을 남한 정부가 달래준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북한 아이들에게 옥수수·분유를 보내준다고 약속하고 안 보내주면 통일 된 뒤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게 아닙니까. 북한에 대해 보수적인 사람들도 인도적 지원은 찬성한다는 것을 정부가 생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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