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쿠르드족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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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82년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 '욜' 은 터키의 반체제 영화감독 일마즈 귀니의 작품이다.

이 영화 가운데 터키에 사는 한 쿠르드인이 터키 - 시리아 국경에서 철책 너머 시리아에 살고 있는 친지를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분노를 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족의 비극이다.

영화를 만든 귀니 자신도 쿠르드인이다.

쿠르디스탄 산악지대에 사는 쿠르드족은 인구가 2천만이나 된다.

그럼에도 독립된 나라 없이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옛소련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전체 쿠르드족의 절반이 거주하는 터키는 쿠르드족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쿠르드어 사용조차 금하고 있다.

터키 다음으로 쿠르드족이 많이 사는 이라크에선 비교적 덜 탄압받았으나 이란.이라크전쟁과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반대편에 섰다가 호된 시련을 겪고 있다.

쿠르드족의 비극은 1차세계대전후 강대국들이 중동의 국경을 멋대로 그은 데서 비롯한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오스만투르크제국 지배아래 있던 모든 비 (非) 투르크 민족들이 '자율적으로 발전할 기회' 를 보장했다.

1920년 체결된 세부르조약은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를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터키가 군사강국으로 재등장하면서 세부르조약은 휴지조각이 되고 대신 로잔조약이 체결됐다.

로잔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관한 조항은 사라졌다.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쿠르드족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현재 쿠르드족 자치.독립운동은 이라크와 터키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에선 쿠르드민주당 (KDP) 과 쿠르드애국동맹 (PUK) 이 서로 대립하면서 자치 확대를 노리고 있다.

한편 터키에선 지난 79년 창설된 쿠르드노동자당 (PKK) 이 쿠르드족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터키정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

최근 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이 아프리카 케냐주재 그리스대사관에서 터키 특수부대 요원들에 붙잡혀 터키로 압송된 사건이 발생하자 유럽 각지에서 그리스.케냐.이스라엘 공관 (公館)에 대한 쿠르드족의 과격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오잘란 체포에 미국.그리스.케냐.이스라엘정부가 개입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중동정치에서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이다.

이번 사건으로 쿠르드족 독립문제는 다시 한번 전면에 나타나 국제사회에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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