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노해씨 신작 10편 '창작과 비평'에 발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낡은 시간의 흔적들/진보라는 이름 속에 도사린 낡아빠진 껍질들이/이 새로운 공동체 앞에서 투명하게 떨린다//물방울 튕기듯 웃는 민이 친구들과 손잡고 걸으며/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하고 부정하다가/그만 낡은 것들을 닮아버린 오, 우리를/너희는 너그러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상쾌한 깨어짐으로 내가 막 떨린다" 박노해 (42) 시인이 시 10편을 발표했다.

이번주중 나올 '창작과비평' 봄호에 실릴 이 시들은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에 연루, 투옥돼 지난해 8.15특사로 풀려난 이후 박씨가 최초로 발표한 시. 시를 발표하며 박씨는 '혁명가' '사상가' 등 시인 이외의 칭호는 일단 다 떼어놓고 진정 시로서만 평가받고 싶다고 밝힌다.

이번에 발표한 신작시편은 우선 폭넓은 공감으로 다가온다. 83년 동인지 '시와 경제' 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씨는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 등의 시집을 펴내며 노동.민중시의 가장 첨예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날 선 창끝 같은 시어로 적의 심장을 겨누는 적대적 전투성. 그러나 이번 시편들은 시인 자신의 '상쾌한 깨어짐' 으로 너나 구분없이 정신적 떨림을 주고 있다.

위 시 '살아온 시간들이 떨린다' 일부에서 처럼 시인은 민감한 감성과 경쾌한 지성으로 물방울 튕기듯하는 신세대라는 새로운 공동체 앞에서 떨고 있다.

그 떨림은 이미 각질화된 진보의 자기반성에 대한 것이며 새로운 공동체의 희망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만물은 서로 핏줄처럼 맺어져 있고/땅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이들에게도 닥칠 것이니/이 땅에 짓는 사랑은 곧 인간에 짓는 사랑의/바탕 뿌리임을 굳게 믿습니다/새봄에도 건강한 몸으로 더 많은 사랑의 노동을 지어가게 하소서/좋은 일을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 사이좋게 해나가게 하소서" 시인이 꿈꾸는 새로운 공동체는 '사랑의 노동' 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다.

'세기말 성자의 기도' 에서 시인은 사람뿐 아니라 "물질경이.벗풀.새뱅이.미꾸라지.새들까지 서로를 먹여살리며 한 가족" 을 이루는 세계다.

"만물은 서로 핏줄처럼 맺어져" 있기에 가족이다. 이같이 박씨의 시들은 우주 삼라만상을 핏줄, 사랑으로 아우르고 있다. 이같이 박씨의 시들의 깊이와 넓이를 이루는 것은 각성을 통한 변화에의 순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코 식을수 없는 진보에 대한 열정이다.

"텅 빈 밤거리를 날이 밝을 때까지 걸어/낮 시간에 잠깐씩 공원 벤치에서 눈 붙이고/다시 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나는 이대로 망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내 하나뿐인 육신과 정신마저/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둘 순 없기 때문이다//…//밤이면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눈 뜨고 내가 걷는 이유를 너는 모르지//내 안의 불덩어리를 너는 정말 모르지" '내가 걷는 이유' 에서 박씨는 결코 져버릴수 없는 진보, 새세상에 대한 불덩어리같은 열정을 결의처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의 고독함도 드러내고 있다. 좋았던 아내와 아이도, 따뜻한 아랫목도 그립지만 기어코 가꾸어내야할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해 오늘도 시인은 눈뜨고 밤길을 걷겠다 한다.

이 시를 읽어본 문학평론가이자 '창작과비평' 주간인 최원식씨는 "박씨가 다시 훌륭한 시인으로 돌아온 것 같아 반갑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사상적 거처와 구체적 심상들이 잘 어울린다" 고 평했다. 자꾸 시가 왜소해지는 시절, '큰시' 에 대한 상찬일 것이다.

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