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동서남북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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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동서남북이란 편의상 사람들이 설정한 방향에 불과하다.

동이려니 여기고 가다보면 끝닿는 데는 서요, 서편이려니 생각하고 가다보면 맞닿는 데는 동이 된다.

그것은 남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땅바닥에 선을 긋고 땅뺏기 놀이를 벌이듯 둥근 지구를 세쪽, 네쪽으로 나누고 패싸움을 벌이는 것은 성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극히 작은 땅덩어리 한반도를 이데올로기와 정략수단으로 갈라놓고 공방과 대결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 그것도 외세의 간섭에 의해 나라가 두쪽 된 지 어언 반세기, 아직도 통일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는데 어쩌자고 남북 분단의 상처 위에 동서 분단의 아픔을 가중시키고 있는가.

87년 4월 종교관계 회의차 뉴욕을 방문했던 길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게 됐다.

대학 교수인 친구 집 저녁 식사에 초대됐는데 마침 중학교 다니는 딸과 그 친구들이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과 이런 얘기를 주고 받았다.

"너희들 코리아를 아느냐?" "잘 모릅니다. " "세계 지도책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습니다. " "그러면 그 지도책에서 코리아를 찾아라. 만일 너희들이 찾아낸다면 2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 "

88년 올림픽 전이었기에 미국 아이들에게 코리아는 낯선 미지의 나라였다.

아이들은 지도책을 펴놓고 코리아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시아라는 힌트까지 주었는데도 끝내 그네들은 코리아를 찾지 못했다.

이유는 그 지도책에 그려진 코리아는 유별나게 작았고, 그 탓으로 코리아 (KOREA) 라는 영문 이름을 써넣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작은 나라, 지도책에서도 찾기 힘든 나라, 그 나라를 동서남북으로 갈라놓고 긴긴 세월 편싸움만 벌인다면 나라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한스럽고 걱정스럽다.

동서남북 사분법의 원인은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 소아병적 무지 때문이며 집권을 탐내는 싸움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민초들이 나서서 편을 가르거나 패거리 싸움을 벌인 적은 없다.

걸핏하면 국민들을 들먹거리고 대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셈은 딴 데 있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지역 감정, 이젠 지겹고 신물난다.

캐나다 토론토가 자랑하는 세계적 명물인 나이애가라 폭포는 태고 (太古) 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세계 절경 (絶景) 중의 하나다.

1678년 프랑스인 헤네핑이 발견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폭포의 높이는 48m, 폭은 9백m에 이른다.

몇 해 전 토론토에 살고 있는 친구의 안내로 나이애가라 폭포를 구경하다가 "이 폭포 서울로 옮겨 놓으면 좋겠다" 고 했더니 그 친구, "이 폭포는 거져 주어도 서울엔 옮겨다 놓을 곳이 없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이애가라 폭포의 물 근원은 온타리오 호수인데 온타리오 호수 넓이가 서울보다 크다는 것이다.

영토넓이와 국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정신과 지도계층의 지도력은 국력을 좌우한다.

땅 덩어리가 크다 해서 반드시 선진국가나 강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땅 넓이와 국민기질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21세기가 눈앞에 성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면 세계 역사는 초속적 변동을 거듭하고 있다.

치열한 국제경쟁에서의 생존권을 지키려면 두 눈을 부릅뜬 채 대응전략을 세워도 모자란다.

자중지란 (自中之亂) 은 언제나 국가적 재앙을 자초했고 국가발전을 후퇴시켰다.

사색당쟁과 외침,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 우리에게 떠넘겨준 것은 치유하기 어려운 한 (恨) 이었고 불행이었다.

정치 (政治) 는 바로 다스리는 정치 (正治) 논리가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감싸고 껴안는 덕치 (德治) 라야 그 빛이 드러난다.

성서는 공의와 사랑은 서로 입맞춰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 찬바람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난제들, 당장 풀지 않으면 안될 저 수많은 숙제들을 언제까지 남보듯 할 것인가.

하루 빨리 조간 신문을 펼 때마다 기분 좋은 얘기들을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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