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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 답사기] 25. 고은·김주영과 함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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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 못지 않게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 나의 두번째 방북길을 당대의 소설가 김주영, 일세의 시인 고은과 함께한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배움이었으며 답사기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본래 여행이란 인간을 송두리째 노출시킨다. 한 지붕에서 자고, 한 밥상에서 먹고, 매일 한 길을 가다 보면 고운 모습 미운 모습이 다 드러나 아무리 친한 친구와 같이 가더라도 3일만 지나면 반드시 싸우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그래서 여행 뒤에도 친한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도 있다.

그런데 두 분은 보름을 같이 지내도록 싸움 한번 안했다. 본래 셋이 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한 사람이 '왕따' 로 몰리게 마련인데 그런 일도 없었다.

내 생각엔 그게 있었을 텐데 노숙하게 피해간 것 같다. 본래 당수 7단과 유도 7단은 절대로 겨루지 않는다. 시인 고은과 소설가 김주영은 작품세계가 다르듯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고은 선생은 그 불타는 열정을 대상에 다 쏟아놓는다. 어딜 가도 정을 뿌리며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대로 정을 듬뿍 담아온다.

계곡물 만나면 발을 담가야 하고, 모래밭에선 맨발로 걸어야 하고 산에 오르면 절을 해야 하고 춤패를 만나면 그 속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그래서 모름지기 그 대상과 흔연히 하나되기를 원하며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는 명구는 이렇게 나온 것이다. 연분홍 해당화가 청초하게 피어 있던 원산 명사십리에서 먼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며 묵상에 잠긴 고은 선생이 훗날 어떤 시를 쓰나 내 눈여겨보겠노라고 기다렸더니 세상에! "내가 여자라면 한밤에 여기서 애를 낳고 싶다" 고 했다. 발가벗고 뛰는 것도 모자라 가랑이 벌리고 그곳까지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소설가 김주영은 아주 냉정하게 관찰하며 좋아도 좋다는 말 한마디일 뿐 더 이상 감정의 진도가 안 나간다. 그는 빨리 가서 빨리 보고 빨리 돌아오길 원했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그를 '속도전' 이라고 불렀을까. 그러나 그는 그냥 흘끗 보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지금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아라리 난장' 같은 것을 보면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요즘 소설들을 보면 1인칭 소설이 아닌 경우에도 작가 자신의 고백인 것이 많은데 김주영은 철저히 작중인물을 통해서만 세상과 사물을 말하고 탐색한다.

그처럼 사물을 냉정하게 제3자 입장에서 따지며 보는 습성이 배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그림 보는 눈도 밝았다. 백두산 베개봉려관 상점엔 풍경화가 50여점 널려 있었다. '속도전' 소설가는 벌써 달려가 한 점을 골라놓고 내게 "어때?" 하고 묻는데 내가 보기에도 명작이었다. 그래서 "눈알을 빼냈으니…" 하고 혀를 차고 말았다.

이때 안목 높기로 이름있는 권영빈 단장이 옆에 와서 우리의 수작을 보면서 "진짜 좋은데, 이건 공용 (公用) 으로 우리 연구소에 걸자" 며 냉큼 집어갔다. 김주영 선생이 조금은 서운해하는 눈치여서 내가 다른 작품을 권했더니 답하기를 "나도 아까부터 그걸 보았는데 호수가 산에 닿은 부분이 어색해서 싫어" 하며 사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미세한 직선이 눈에 들어오다니!

고백하건대 나는 두 분께 한차례씩 얌체짓을 한 적이 있다. 고은 선생은 정을 당기는 습성 때문에 정의 징표를 잘 찾았다. 그래서 나는 내 전공과 특기를 발휘해 참으로 많이 주워 드렸다. 금강산 신계사터에선 와당편을, 개성 만월대에선 청자 사금파리를, 묘향산 금강굴에선 서산대사 기품에 맞을 생나무 지팡이를…. 가는 곳마다 주워 드리니 그 솜씨에 놀라 내 책의 추천사를 쓰면서 "그는 사람이기 이전에 짐승이더라" 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두산 장군봉 정상에서는 거짓말 아닌 진짜 호랑이가죽을 주웠다.

손바닥만한 이 호랑이가죽은 이른바 호표 (虎標) 라고 해서 옛날에 마적이나 독립군이 옷에 훈장 같은 기분을 내며 장식으로 달았던 것이다.

바느질 구멍까지 남아 있었다.남한 답사객은 물론 북한 안내원들까지 죄다 놀라며 만져보고 감탄을 발했다. 고은 선생은 계속 호랑이털을 쓰다듬으며 "신기해, 멋있어, 50년도 더 됐겠어" 하며 손을 떼지 못했다. 순간 나는 고백했다.

"선생님, 저도 인간입니다. 이것만은 제가 갖겠습니다. " 그러자 고은 선생은 절망적으로 "그러게나" 하면서도 한쪽 귀퉁이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어이, 나도 인간일세. 요만큼만 오려주게나. " 이럴 수 있는 것이 고은 시인이다.

평양의 보통강려관 상점에는 수예 소품들이 빼곡이 걸려 있었다. 대개 그렇고 그런 것인데 유독 하나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를 수로 놓은 것은 아주 참해 보였다. 김홍도를 수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했다.

나는 무조건 그것을 사려고 맘먹고 있는데 김주영 선생이 슬슬 그쪽으로 가는 것이 불안했다. 나는 얼른 50달러를 주고 사버렸다. 그러자 김주영 선생은 약간은 어이없어 하면서 내게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잘 그리는지 이름이나 알아둡시다. " 그래서 내가 "밑그림은 단원입니다" 라고 알려주자 "단원이야? 그러면 그렇지!" 라며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현역이길 바랐던 모양이다. 이처럼 김주영 소설가의 눈은 매섭다.

그런데 두 분이 아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수첩에 메모하는 것이었다. 김주영 선생의 작업노트를 보면 누구든 기겁을 하고 말 것이다. 깨알 같은 글씨를 개미가 기어가는 필체로 아침이고 밤이고 틈만 나면 책상에 웅크려 그리듯 써 나간다. 무얼 쓰는지 그렇게 쓴다.

저녁때 심심해 옆방으로 마실갔다가 미안해서 되돌아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은 선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보름의 여행 중 1주일을 나와 한방에서 지냈다. 서로의 안보를 위해 그랬던 것이다. 그건 좋았는데 잠들려면 서로 불편했다. 코라도 골아 민폐를 끼칠까봐 서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려고 했다.

대개는 내가 늦게 자고 고은 선생이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 고은 선생은 무언가를 계속 쓰고 계셨다. 내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불도 쓰지 않고 화장실도 안 가며 쓰고 또 쓰고 있었다. 한번은 잠에서 깨고도 고은 선생의 시상 (詩想) 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꼼짝않고 기다려 보았는데 메모하다 입에 펜을 대었다가 또 메모하다 먼 데 창밖을 보다가 하기를 무려 한시간 넘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고은과 김주영은 가끔 다작 (多作) 을 결함으로 지적받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들은 그냥 많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남과 똑같이 살면서 많이 쓴 것이 아니라 남보다 많이 살면서 많이 쓰는 것이었다. 그런 장인 (匠人.프로) 적 노력과 열정이 그들의 일상 속에 그렇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글쟁이로서는 생 (生) 아마추어였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다음회는 '북한의 향토음식'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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