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지구촌 '헌법'과 두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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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 천년을 맞는 지구촌의 '헌법' 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오염과 전쟁.테러.빈곤 및 질병의 고리를 끊고 세계 시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행동강령이 될 '21세기를 위한 보편윤리 (universal ethics) 헌장' 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유엔헌장과 세계 인권선언이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사회의 양심과 이상을 대변했다면, 보편윤리는 다음 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치규범으로 대두될 전망이다.

다분히 서양의 유대 - 기독교 전통과 남성 위주의 관점으로 만들어진 인권헌장과 달리 보편윤리는 동양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계의 중심사상을 토대로 정신적.도덕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국가와 개인 이기주의를 배격하며 세계 시민으로서 공동이익을 위한 책무를 강조하고 있다.

파리에 본부를 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 의 주도로 입안되고 있는 이 헌장은 국제사회가 공동선을 위해 만든 어떠한 규범집보다 진일보된 것으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인류 사회의 최대 공약수를 찾아내는 역사적인 작업이다.

이 헌장은 현대화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그들의 중요한 가치와 풍습을 포기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서양화로 치달은 모순을 바로잡고, 무시된 전통적 진리의 재발견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다양성 속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문과 25조로 준비되고 있는 이 헌장시안은 올해 말 유네스코 총회의 심사를 거쳐 통과되면 유엔 총회로 이관 상정돼 큰 난관이 없는 한 유엔에 의해 '평화문화의 해' 로 지정된 2000년 밀레니엄 유엔정상회의를 전후로 채택될 전망이다. 특기할 일은 50여년 전 유엔헌장이나 세계 인권선언 제정 당시 한국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반면 이번 보편윤리헌장의 편성과정에는 두 명의 한국인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네스코의 철학윤리국장인 김여수 (金麗壽) 박사는 지난 3년간 세계의 철학자.윤리학자,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과의 포럼을 통해 보편윤리의 골격을 잡는 기초작업과 함께 각국 정부와의 예비교섭을 담당하는 보편윤리헌장의 산파역을 해 왔다.

또 뉴욕에서는 한국의 비정부단체 (NGO) 중 하나인 원불교 유엔대표 이오은 (정옥) 교무가 국제종교단체연합회를 이끌고 보편윤리가 유엔에서 채택될 수 있도록 국제적 NGO들을 통해 세계 여론 조성과 대정부 로비활동을 펴고 있다.

실상 보편윤리의 필요성은 종교단체들에 의해 오랫동안 주장돼 왔으며 보편윤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한스 큉 또한 가톨릭 신학자다.

큉에 의하면 종교의 윤리적 전통은 두 개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모든 인간은 인도적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자신에게 일어나길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는 황금률 (黃金律) 이다.

보편윤리에는 이러한 두 원칙을 비롯해 여기에서 파생된 비폭력과 생명존중, 동료애와 정의로운 경제질서, 관용과 정직성, 남녀의 동등권리와 협력자관계의 원칙 등이 포함돼 있다.

이 보편윤리 시안은 폭넓게 네 분야에 걸쳐 21세기의 세계 시민들과 국가들이 준수할 기본원칙을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명해 어떻게 한없는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지구의 생태계 보존과 함께 만족시키느냐는 문제다.

아프리카의 격언 (格言) 처럼 지구는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게 빌려준 것이니 잘 보호하며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다.

둘째는 인간과 삶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데,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것은 비단 부 (富) 의 축적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사고 및 정서와 같은 '내면적' 만족이 함께 추구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번째는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인데, 현대문명의 바탕인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공동선 (共同善) 을 먼저 생각하고 상부상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편윤리가 다루는 분야는 개인간 또는 국가간의 정의 (正義) 문제다.

남녀평등, 부의 축적 과정에서 지켜야 할 윤리와 진정한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최저생활이 노동으로 보장되는 사회 등을 주장하고 있다.

보편윤리헌장이 완성되면 이것은 초등학교부터 가르쳐야 할 세계교육의 기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환경오염.남북 무력대치.황금만능주의.남녀차별 등 보편윤리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이 헌장은 선진국으로 가는 지침이 될 것이다.

파리에서

구삼열 유니세프 총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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