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327.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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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7장 노래와 덫

차순진 마담이 드디어 울먹이기 시작했다. 승희 역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울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 사건과 음성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조금전의 희미한 오해가 다시 부끄러웠다.

그녀의 흐느낌은 승희로 하여금 동료의식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변씨와의 동거를 성사시켜 주어야 한다는 결의가 가슴 속으로부터 치밀어올랐다.

안동에서 느꼈듯이 옷가방 하나를 들고 안 가는 곳이 없을 만큼 신산을 겪으면서도 때묻지 않은 심성을 유지할 수 있는 차마담이 다시 부러웠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대로 영영 떠나버릴까 불안한 거죠? 절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워낙 다급했던 나머지 훌쩍 떠난 것이지, 마음이 쉽게 변할 그런 분이 아니세요. " 그런 말은 차마담을 위해서라기보다 어쩌면 승희 스스로가 위안받는 듯한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심정으로 승희는 차마담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남을 위로하고 다독거려 줄 수 있는 마음으로부터의 여유와 애정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뒤틀린 심성을 바로 세우는 데 더 없는 약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승희는 하고 있었다.

술청으로 썰렁한 냉기가 몰아쳤다. 코 끝으로 비린내가 물신했다. 검은 장화와 방한복으로 무장한 어부들 셋이 마침 술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목로를 차지하고 앉은 승희를 발견하고 반색이었다.

시중 드는 주인은 바뀌어도 그들은 예처럼 영동식당을 드나들고 있었다. 난로가에 모여 서며 그들은 승희에게 물었다. "시골 장마당 뛰어다니면서 수입이 짭짤하다는 소문은 진작 들었는데, 어쩐 일이여?" "집이 여긴데, 이상할 거 없죠. 참 오랜만이네요. 여전들 하세요?"

"기댈 언덕이라곤 포구의 방파제뿐인데, 엎어지나 자빠지나 이 바닥에서 뭉그적거리며 연명할 수밖에. 시골 장터는 경기가 어때?"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그런 대로 견딜 만 해요. 사람 사는 곳이 별다를 곳이 있겠어요. " "박봉환을 며칠 전에 여기서 봤는데, 요사인 두 사람이 서로 등 돌리고 사는 것 같어?"

"살아남기 바쁜 세상에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돌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 "말대꾸 대수롭지 않게 척척 받아넘기는 반죽을 보자니, 한 일년 사이에 승희도 많이 컸구만. 식당 경영할 걸 염두에 두고 다니러 온 게 아니구만. " "식당 경영은 나보다 묵호댁이 맡아서 짭짤하게 하고 있는데, 내가 왜 해살을 놓겠어요. " 처음부터 시무룩해서 조리대에서만 맴돌고 있던 묵호댁의 손길이 그때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도마질 하는 소리에 신명이 난 듯했다. 그리고 주문하지도 않았던 맥주 한 병과 회접시 하나가 식탁으로 나왔다. 한철규를 따라 주문진을 떠나 다시 포구로 돌아오기까지 긴 시간 동안 처음으로 대가 부담없이 받아보는 공짜였다.

묵호댁이 내놓은 공짜를 계기로 세 사람의 어부와 두 여자는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처럼 가슴 속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끝장이라도 보려는지 젊은 어부가 다시 박봉환을 들먹이고 있었다.

"근데, 봉환이 그 사람 장돌뱅이 신세 그만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어. " "그만두다니요?" "윤종갑이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위인이어서 속시원한 대꾸는 없었지만, 어쨌든 시골 장터 찾아다니기엔 진력이 났던지 이별하겠다는 눈치더군. " "장사꾼들 속내는 눈치 한가지 갖고는 알아낼 재간이 없어요. " 승희는 조리대의 묵호댁을 힐끗 돌아다 보았지만, 이렇다 할 내색은 없었다.

박봉환이 다녀갔다면 그런 내막이야 묵호댁도 알고 있음직하였다. 그러나 다잡고 물어 볼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심각한 표정의 한철규가 술청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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