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으로 치닫는 오바마 ‘과거 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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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부시 정권과의 가장 뚜렷한 단절(the biggest break).”

미국 정부가 24일(현지시간) 중앙정보부(CIA)의 테러 용의자 학대 보고서를 공개하고 특별검사를 지명해 재수사키로 한 데 대해 미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WP)는 26일 이렇게 평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이래 꾸준히 추진해 온 ‘과거 청산’ 작업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취임 때부터의 소신=오바마는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테러 용의자에 대한 가혹행위를 금지시켰다. CIA가 물고문과 같은 가혹한 신문 기법을 ‘떳떳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승인된 소위 ‘강화된 신문 기법’이 근거였다. 미 상·하원이 지난해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신문 수단이 제한돼 테러 방지 능력이 저하된다”는 이유였다. 오바마의 행정명령은 이를 180도 뒤집는 것이었다.

4월에는 한 발짝 더 나갔다. 부시 정권 때 법무부가 CIA에 내려 보낸 ‘테러 용의자 신문 지침’ 메모를 공개했다. 정권 차원에서 법으로 테러 용의자 고문을 보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 법무가 24일 2004년 작성된 CIA 내부 감찰 보고서를 공개한 것은 오바마 행보의 ‘종합판’이었다는 게 미 언론의 평가다.

◆인적 청산 가능할까=오바마의 ‘과거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특히 고문 관계자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문제다. “법적·정치적 장애가 많을 것”이라는 게 WP의 전망이다. 고문에 관계된 CIA 요원을 형사 기소하기 위해선 그들의 고의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증거 확보가 힘든 상황이다.

전 정권 시절 자신들이 이뤄 놓은 ‘업적’을 부인당했다고 생각하는 공화당이 펄쩍 뛰고 있는 것도 문제다. 전 정권의 ‘대변인’을 자임하고 있는 딕 체니 전 부통령은 TV 인터뷰에서 “오바마 정권에 국가 안보를 책임질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맹비난했다. “강화된 신문 기법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덕에 생명을 살리고 테러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가혹한 심문) 관계자들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백악관은 이와 관련, “CIA 요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했다면 처벌은 없을 것”이며 “누가 법을 어겼는지 여부는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판단할 것”이란 원론적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민주당·인권단체 “책임자까지 처벌”=오바마의 ‘아군’인 민주당과 인권단체들은 공화당과 정반대 방향에서 오바마를 압박하고 있다. “CIA 요원들은 물론 그들에게 가혹행위를 허가하고 명령한 책임자들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4월 국무부 지침을 공개했을 땐 “가혹한 신문을 허용한 지침은 잘못됐지만, 이에 근거해 신문을 한 CIA 요원들을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가혹한 신문을 허용한 지침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선 “다양한 법률적 기준에 따라 법무장관의 결정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사법 처리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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