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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칼럼]지도자의 모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예나 이제나 훌륭한 지도자들은 국민이 본받을 많은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희생과 헌신으로 국민을 감동시킨다.

그런 모범과 헌신에서 곧 지도력이 나오고 국민신뢰를 얻는다고 볼 수 있다.

현대중국의 지도자들은 비록 국민의 직접선출에 의하진 않았지만 청렴과 검소의 모범으로 중국인의 신뢰를 얻고 있다.

저우언라이 (周恩來).덩샤오핑 (鄧小平) 등은 너무나 간소한 장례식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鄧의 각막은 기증되고 유체는 의학용 해부를 한 후 화장됐다.

지금의 장쩌민 (江澤民) 주석도 매우 검소해 그가 상하이 (上海) 시장 시절 공식식사때 남이 남긴 계란을 대신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부인이 하루는 손님을 만나러 호텔에 갔다가 호텔 종업원들이 막일을 하는 여자로 보고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제3의 길로 각광받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사후 장기기증을 약속했고, 체코의 하벨 대통령은 전재산의 사회 헌납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칭송받는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남다른 모범과 헌신을 실천하고 있다.

어떤 나라라도 안정되고 발전하자면 대중이 지도자를 본받고 모방하는 의식상태가 돼야 한다.

대중이 지도자를 우습게 알고 겉으로 복종하고 뒤로 경멸한다면 그 나라는 심각한 병에 걸린 나라다.

지도자가 청렴.정직하고, 대중이 자기도 청렴.정직해야 출세할 수 있겠구나 하고 믿을 때 그 나라가 청렴.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가 민주적이고 법을 존중하는 모범을 보이고, 대중이 그를 본받을 때 그 나라는 민주.법치국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부패.사치하면서 국민에게 청렴.검소를 외쳐본들 따를 사람도 없으려니와 그 나라는 결국 부패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

지도자가 자기는 법을 안 지키고 비민주적이면서 민주.법치국가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지도자의 모범.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인간적 신뢰가 그만큼 중요하고, 이런 모범과 신뢰없이는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는 것이다.

새해는 국운 (國運) 이 걸렸다고 할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해다.

경제위기를 끝장내야 하고, 내각제 개헌문제를 안전하게 처리해야 한다.

북한과도 핵의혹.미사일문제의 결판을 내야 하고, 한해 앞으로 다가온 새 천년대의 설계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운명을 좌우할 이 모든 일은 하나같이 탁월한 리더십과 국민적 단합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고, 국민이 그런 지도자를 믿고 마음으로 따를 수 있어야 이 과제들은 성공할 수 있다.

지난해 우리는 비록 경제회복의 한줄기 자신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위기극복의 구체적 그림이나 국민적 화합기반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무한정쟁 (政爭) 과 깊어지는 지역갈등에 소외계층문제가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열심히 개혁을 하고 구조조정을 했지만 이대로 가면 어디에 도달하고 어떤 나라가 될는지에 관해서는 새 천년대가 가까운데도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사회적 논의도 없다.

지도층으로부터 국민을 감복시킬 이렇다 할 모범도 나오지 않고 있고 지도층에 대한 인간적 신뢰가 여물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외친 정부에서 도청.감청.사찰 따위의 시대착오적 현상이 잇따라 터져 나오고 고문이니, 계좌추적이니, 야당죽이기 같은 살벌한 소리가 시끄럽다.

대쪽과 법치를 간판으로 하는 야당에서도 장외투쟁.화형식이 나오더니 급기야 점거.농성.방탄국회같은,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보기에 여야 모두 언행불일치요, 이중플레이가 난무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이 본받을 무슨 모범이 있겠으며, 대중이 감복하고 따를 인간적 신뢰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앞으로 내각제문제 같은 것은 자칫 잘못 다루면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경멸을 한층 더 깊게 할 가능성이 큰 문제다.

만일 올봄에 내각제혼란과 추가 양산 (量産) 이 확실시되는 실업자문제에 더해 북한 핵긴장까지 겹친다면 커다란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이런 판에 지도자들이 다시 언행불일치.안면몰수.죽고살기식으로 나간다면 우리는 이 천년기 (千年紀) 의 전환에서 일대 좌절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새해엔 대중이 본받고 감동할 지도자의 모범이 더욱 절실하다.

중국 지도자들 같은 삶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와 법을 지키고 대중이 인간적 신뢰감을 가질 정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지도력이 반드시 나와야겠다는 것이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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