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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토끼와 거북이'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세 살 꼬마도 다 아는 얘기 하나. 어느 날 토끼는 거북이와 언덕에 빨리 오르기 내기를 했다.

초반부터 달음질친 토끼는 한참 뒤진 거북이를 보고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거북이는 땡볕에도 쉬지 않고 기어 잠자는 토끼의 곁을 지나 마침내 언덕에 먼저 올랐다.

이솝우화 가운데서도 입문격인 '토끼와 거북이' 다.

토끼가 거북이에게 자신만만한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산토끼는 시속 78㎞인데 거북이는 시속 3㎞밖에 안되니까 말이다.

이 얘기는 흔히 '자신의 재주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지 말라' 는 뜻으로 말해진다.

또 비록 재주가 뒤진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노력하는 이가 승리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백번 옳은 얘기다.

그런데 요즘엔 이 얘기를 비판하는 얘기도 등장했다.

자신의 재빠름을 믿고 잠자는 토끼도 문제지만 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그 곁을 몰래 엉금엉금 지나갔던 거북이도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통해 '무조건 승리하면 된다' 는 잘못된 교훈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새로 쓰인 이솝우화는 이렇게 바뀐다.

엉금엉금 기어가던 거북이는 낮잠 자는 토끼 곁을 지나가게 되자 토끼를 깨운다.

깜짝 놀라 일어난 토끼는 거북이가 고마워 거북이와 자신의 다리를 한데 묶어 달리기로 한다.

언덕에 함께 오른 토끼와 거북이. 기묘년이 시작됐다.

올해의 화두 (話頭)가 여럿 있겠으나 그 중에서 연봉제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3급 이상 공무원을 비롯해 시중은행 3급 이상, 정부투자기관 1급 이상 임직원, 지방공사와 공단의 부장급 이상에게도 연봉제가 실시된다.

기업체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상공회의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올해는 국내 상장기업중 56%가 연봉제를 한다.

지난해의 두배에 가깝다.

뿐만 아니다.

이미 연봉제를 실시중인 기업들도 대부분 적용대상을 넓힌다고 한다.

민주노총이 실시한 최근 조사에서도 이미 생산기능직의 0.5%, 사무관리직의 2.7%, 판매서비스직의 9.1%가 연봉제에 들어갔으며 앞으로 생산기능직의 12.4%, 사무관리직의 24.7%, 판매서비스직의 21.9%가 연봉제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연봉제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마냥 옛날과 같지는 않다.

이들에게도 상여금을 차등화한다든지 성과급제를 도입한다는 말이 들린다.

자신이 일한 성과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연봉제는 그간 나이.경력.학력에 의존해 '평등한 급여' 를 즐겨 왔던 봉급자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함께 입사했는데…' 또는 '같은 부장인데…' 하면서 달라진 급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유난히 '나와 다른 남' 을 인정하지 못하는 단일민족의 '무차별 평등의식' 은 이런 상황을 더욱 감내하기 어렵게 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작금의 연봉제가 함께 나눌 파이를 키워나가는 데 뜻을 둔 연봉제이기보다 거의 일정한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초점을 둔 '한국식 연봉제' 이고 보면 직장인들간의 갈등은 자연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연봉제를 실시중인 한 회사에서는 입사동기인 후임자에게 업무인계를 대충해준 이도 있다고 한다.

자신의 노하우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인 양 하는 이도 없지 않다고 한다.

연봉제 사회에서 '잠든 토끼를 깨우는 거북이' 가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토끼와 거북이가 정당한 경주를 펼치지 않고서는 연봉제가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잠든 토끼를 깨울 수 있는 거북이로 만드는 데는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엄격한 객관적 평가기준을 만드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임금삭감이나 고용자를 내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용주나 고용자나 할 것 없이 '제몫 바로 찾기' 가 연봉제라는 인식을 심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기업들의 연봉제는 참고할 만하다.

인사고과 평가를 최하위 등급으로 받은 사람이 다음해에 연봉이 줄어든 경우는 12.4%에 지나지 않았으며 절반이 전년수준을, 22.3%는 전년보다 높았다고 한 조사는 전한다.

경제회생을 피부로 느끼기엔 아직 이른 올해. 서로 격려해가며 나란히 달리는 토끼와 거북이를 만나고 싶다.

홍은희 생활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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