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치문제는 정치로 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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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치권은 정치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고 검찰에 떠넘기는 악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당끼리 걸핏하면 고소.고발을 하고, 정치 쟁점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 생각은 않고 검찰수사와 재판에 맡기는 것이 자주 나온다.

이러다가 자칫 이 나라 정치는 검찰이 다 하는 꼴이 될 판이다.

세상에 법치국가치고 검찰이 정치를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총풍.세풍 등 오늘의 큰 정치 쟁점치고 검찰에 가 있지 않은 사안 (事案) 이 어디 있나. 심지어 정계개편까지 검찰수사에 좌우되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법조계에서 "검찰이 불쌍하다. 정치가 없으니까 검찰이 죽을 지경" 이란 말까지 나온다.

새해 벽두부터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국회 529호실 사건도 결국은 정치문제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제를 정치로 풀려는 노력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은 채 사건은 곧장 검찰로 넘어가 버렸다.

국회사무처.안기부직원 등이 즉각 야당을 고소하고, 야당도 곧 안기부관계자 등에 대한 고발방침을 밝히면서 장외투쟁까지 거론하고 있다.

도대체 다른 곳도 아닌 국회 안에서 일어난 정치문제를, 국회의 주인공들이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인 여야가 자기네들이 해결해 볼 생각조차 않고 문제를 곧바로 검찰에 넘기는 이런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여야는 정치를 포기한 것인가.

국회를 검찰에 맡길 작정인가.

우리로서는 이같은 사태의 진전을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국회 안에서 안기부의 정치사찰 의심이 가는 일이 벌어지고, 또 다수의 의원이 불법적으로 문서를 탈취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의장이나 국회사무처는 책임감을 느끼고 사태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는 것이 당연한 사리다.

그런 사찰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곧 입법부의 독립성과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요, 국회의원의 일탈행위는 입법부 자체의 기강문제이기도 하다.

국회의장과 사무처가 그런 자체문제를 놓고 스스로 해결하거나 책임을 느끼는 과정도 보이지 않은 채 대뜸 고발부터 한 게 과연 온당한가.

여야 정당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입법부의 구성원인 이상 자체문제를 자체해결하려는 노력없이 어떻게 서로 비난만 하면서 문제를 검찰로 떠넘기는가.

우리로선 정말 한심한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

물론 이번 사건의 본질은 사찰여부에 있다.

야당이 문을 부수고 서류를 가져간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 문제는 그 문제대로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과거에도 여야격돌때 야당이 국회기물을 부수거나 서류를 파기한 일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사찰여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문제의 529호실이 정말 안기부 분실이었고 사찰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는 입법부 권위에 대한 침해이자 엄중한 정치적.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문제다.

여야는 이제라도 입법부차원에서 사태의 본질규명과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하며 가능하면 특별조사위원회구성 등의 방안도 논의해 봄직하다.

더 이상 정치를 검찰에 떠넘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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