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신춘 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소인국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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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풀에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그의 어머니는 몹시 엄한 얼굴로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주고는 그 속의 말끔한 사내를 가리키며 아버지라고 일러주었다.

그런 새벽이면 어머니 또한 울 안의 살구나무 그림자만 흔들려도 화닥닥 일어나 문을 열어 보곤 했다. 밤잠을 설치던 어머니의 머리에 서리가 허옇게 내리는 동안에도 사진 속의 아버지는 낡기만 할 뿐 세월도 비켜가는 운 좋은 사내였다.

한번도 아버지를 찾아 나선 적이 없는 어머니는 기다림에 이력이 난 사람처럼 늙어갔지만 그는 철이 들고부터 아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모자 (母子) 의 삶을 보상받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나선 길 끝머리에서는 매번 헛걸음이었음을 아프게 확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숱한 한뎃잠을 자고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마당엔 잡초가 길다랗게 우거져 있고 살구나무 밑둥 옆에는 두 남자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 세상에 외따로 떨어진 것 같아 사는 게 겁이 나더군. 그래서 다시 아버지를 찾아 나섰지. 내 삶의 전부를 그에게 볼모로 잡힌 기분이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내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였어. 하지만 그렇게 세월을 낭비한 뒤에야 아버지란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알게 됐지.

어머니는 그 위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자라길 바랐던 건데 말이야.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었는데 나는 헛것을 찾아다녔던 거지. 돌아보니 나는 주인이 버리고 간 빈집 같은 꼴이더군.

그 이후로도 나는 숱한 미련 때문에 다니고 다닌 길을 또 되짚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찍었지. 그 사진들은 다 내 지난 자취고 텅 빈 역사 (歷史) 야, 슬픈 역사. 그는 고아 같은 표정으로 서글픈 전설을 뱉어 내며 앉아 있었다.

나는 그 가여운 사내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는 이제 그만 다리 아픈 걸음을 멈추고 싶다고 했다. 새벽길을 걷는 발 빠른 나그네의 환영을 쫓지 않고 이제는 자기의 마당을 가꾸고 싶다고, 그 마당에 한 번 발을 들인 사람은 절대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그 마당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리운 밤이야. 그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오페라 '자니 스키키' 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를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밤이었다.

그날 밤 그는 칼라스를 반복해 들으며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그랬듯 마른 손으로 내 온 몸을 죄 쓸어 주었다. 그는 내 속으로 들어오게 문을 열어 달라고 했지만 나는 도로 빗장을 단단히 지르고 있었다.

나는 당신하고 그저 안고 있고만 싶어요. 나는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맨살이 부대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그 후 그는, 비가 몹시 내리는 날이면 흰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다니다가 취한 모습으로 불쑥 찾아와 말없이 한 오분쯤 내 얼굴만 깊이 들여다보다 돌아갔다.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백발의 노부인이 가게로 들어와 묵주와 두 팔을 벌린 성모상을 사갔다. 그녀는 노부인에게 금으로 된 묵주반지를 선물했고 노부인은 몇 번씩 사양하다 겨우 허락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음 깊이 우러난 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노부인이 나가기 전에 나는 그와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참으로 적요한 오후 한때의 평화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 주던 그녀가 다시 내 옆에 앉으며 안타깝게 말했다. "얼마 못 사는 분이세요. 자기 관에 넣을 성모상이랑 묵주를 방금 사 가신 거구요. " "그걸 넣으면 죽어서도 외롭지 않은가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녀가 글쎄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마 아까의 실수가 상기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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