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하루우라라' 희망이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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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하루우라라(ハルウララ)'-. 늘 지기만 하는 경주마의 이름이다. 120번 가까이 출전했지만 단 한번도 일등을 못해본 말이 바로 하루우라라다. 그것도 일본의 중앙무대도 아닌 도사(土佐)현의 고우치(高知) 지방경마장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지기만 하는 경주마 하루우라라가 일본에선 단연 화제다. 하루우라라가 달리는 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일본 각지에서 고우치 경마장으로 몰려든다. 사람들이 거기 모이는 이유는 하나다. 희망을 보고 ! 느끼고 ! 결국엔 얻고 ! 나누기 ! 위해서다.

*** 지더라도 포기 안하는 경주마

도대체 지기만 하는 경주마가 무슨 희망을 준단 말일까. 하루우라라는 다른 말에 비해 작고 나이도 들어 체력마저 떨어진다. 하지만 경주에 임하면 반드시 한번은 전력을 다해 치고나간다. 그리고 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 정말이지 열심히 달린다. 그런 모습이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잘 풀리지 않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비록 계속해서 져왔지만 그래도 열심히 끝까지 달리는 하루우라라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격려받고 위안받으며 거기서 새로운 희망마저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우라라는 그 자체로 장기불황에 빠졌던 일본 사람들에게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거처가 되었다.

물론 '오죽 희망 찾을 곳이 없었으면 말한테 희망을 찾을까' 하는 생각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희망의 메시지를 되찾은 일본이기에 10년 넘게 지속돼온 장기불황의 늪을 헤어나오고 있는 것 아닐까.

한편 우리는 사회 전체가 무기력의 늪으로 하염없이 빠져들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69%가 희망없이 산다고 한다. 그러니 무기력증이 우리 사회를 휘감을 수밖에. 우리 사회 전반을 휘감은 듯한 무기력증의 원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희망의 상실' '희망의 부재'다.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사회를 구하는 데 희망보다 더 약발 센 것은 없다. 투자가 위축되고 돈지갑이 닫힌 경제를 살리는 데 희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과거에 발목 잡히고, 방향 몰라 갈팡질팡하는 정치를 국민 살리고 나라 살리는 정치로 거듭나게 하려면 역시 관건은 희망이다.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느냐의 여부다.

사실 희망보다 더 크고 강력한 리더십은 없다. 희망을 만들고 희망의 씨앗을 퍼뜨리는 희망의 리더십이야말로 최고의 리더십이다. 희망보다 더 강한 동력도 없다. 희망은 다시 일어서게 만들고 막힌 곳을 뚫게 하며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힘이다. 희망보다 더 큰 보물도 없다.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는 알렉산더대왕에게 "가장 아끼는 보물이 무엇이냐"고 한 신하가 묻자 단호하게 '희망!'이라고 대답했다지 않는가.

희망은 관념이 아니다. 밥이고 힘이다.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이 죽는 이유는 먹을 것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희망을 상실해서다.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희망있는 사람은 산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 대통령직은 '희망을 만드는 자리'

그래서 희망은 생존의 문제다. 취직할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백번 아니라 천번의 이력서라도 새로 쓸 수 있다. 다시 제대로 일할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하면서 버틸 수 있다. 신용불량자의 딱지를 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까짓 오늘의 수모는 참을 수 있다.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지금의 단칸방에서도 견딜 수 있다. 내 자식들에게 내가 살던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오늘 겪는 고생은 차라리 기쁨일 수 있다. 국민은 희망의 정치, 희망 주는 정치를 원한다. 특히 국회는 희망을 만드는 공장이 돼야 한다. 그러니 299명의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하루우라라'가 될 각오를 해라. 무엇보다도 대통령직은 '희망을 만드는 자리'다.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다가오는 8.15 경축사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을 계획이라고 한다. 잘한 일이다. 하지만 희망은 글로, 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행이요 실천이다. 죽도록 달려야 만들어진다. 하루우라라처럼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