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리더십 위기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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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3일 오후 국회 재경위는 공인회계사.세무사.관세사 등 3개 전문직 자격사들의 복수단체 설립허용 법안을 계류시켰다.

이날 오전 국민회의 간부회의가 규제개혁 입법을 뒷받침하지 않는 의원들에게 '경고' 조치를 발동하겠다는 공식발표가 있은 지 불과 한나절도 지나지 않은 때다.

그럼에도 이날 재경위에서 이들 개혁법안이 상정되지 못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 국민회의 의원은 한영애 (韓英愛) 의원 혼자였다.

규제개혁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김종필 (金鍾泌) 총리가 입이 닳도록 약속한 사안이지만 이처럼 정치권 일선에선 뒷걸음질이 계속되고 있다.

국정최고 책임자들의 의도가 굴절되는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년으로 해를 넘길 것이 확실시되는 인권법 제정작업도 그중 하나. 지난 9일 金대통령은 박상천 (朴相千) 법무장관과 국민회의 김원길 (金元吉) 정책위의장.차수명 (車秀明) 자민련 정책위의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국가인권위 위상을 국가기구로 할 것인가, 특수법인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짓기 위한 최고 의사결정자들의 모임이었지만 이날도 아무런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교원정년단축 문제는 리더십 위기의 '백미 (白眉)' 로 꼽힌다.

수천여 교사들의 '목' 이 걸린 정년문제가 며칠만에 60세에서 63세까지 오락가락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당 내부에서조차 조율을 하지 못한 상태다.

심지어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하나가 돼 국민회의 의원들을 따돌리고 63세안을 밀어붙이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

표류하는 국정현안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환란 (換亂) 위기 원인을 규명한다는 경제청문회는 특위구성조차 못하고 있는데, 이는 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의 증인채택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소신이 여권 지도부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5대재벌 빅딜과정에서 불거진 배순훈 (裵洵勳) 정통부장관의 경질 파동은 행정부에서도 국정 최고책임자의 의중이 고르게 뻗어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방증한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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