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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산책] 중국 황제의 장부조작 방지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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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공용의 숫자 표기법은 아라비아 숫자입니다. ‘1,2,3,4,5,6,7,8,9,0’식으로 씁니다.
한자에는 숫자 표기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一, 二, 三, 四, 五, 六, 八, 九, 百, 千’으로 적는 방법 외에도, ‘壹, 貳, 參, 肆, 伍, 陸, 柒, 捌, 玖, 拾, 佰, 仟’로 적는 갖은자 방식이 있습니다. 갖은자라 함은 ‘한자에서 같은 뜻을 지닌 글자 가운데 보통 쓰는 글자보다 획을 더 많이 써서 모양과 구성이 전혀 다른 글자’라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누가 왜 이렇게 복잡한 숫자 표기법을 만들었을까요.
중국에서 갖은자는 명(明)나라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 부패 관리들이 장부를 쉽게 조작하지 못하도록 발명했다는 설이 전합니다. 갖은자의 중국식 이름은 ‘대사숫자(大寫數字)’입니다. 그는 경제 범죄를 엄격하게 단죄했습니다. 법령을 강화해서 경제사범에게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법령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장부 위조 방지를 위해 새로운 숫자까지 만들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갖은자의 창제는 주원장 작품이 아닙니다. 그보다 700여년 앞서 중국을 호령했던 여걸 당(唐)대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바로 갖은자의 창제자입니다. 측천무후의 ‘대악관조상기(岱岳觀造像記)’에 갖은자가 처음 나온 것이죠. 명말청초의 대학자 고염무(顧炎武)가 이를 증명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국호를 주(周)나라로 바꿨을 뿐 아니라 새로운 한자도 만들었습니다. 비칠조(曌)는 지금까지 전하는 측천무후의 창제자입니다. 관리들을 잘 믿지 못했던 그녀가 장부 위조가 용이한 기존 숫자표기법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주원장의 공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7의 ‘漆’을 ‘柒’로, 백을 ‘陌’에서 ‘佰’으로, 천은 ‘阡’에서 ‘仟’으로 고쳐 갖은자을 완성시켰습니다.
중국관료들의 장부조작이 얼마나 심했으면 황제가 친히 위조방지 숫자까지 만들었을까요. 만기총람(萬機總攬)하던 중국 황제들은 챙겨야 할 것도 참 많았습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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