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피노체트와 미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76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는 상당한 접전이었다.

인권과 정의.도덕성을 내세운 민주당의 카터 후보는 51% 득표율로 2백97인의 선거인단을 획득, 2백40인을 얻은 공화당의 포드 후보를 물리쳤다.

이 선거에서 카터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의 하나로 칠레의 군사독재자 피노체트가 꼽힌다.

선거 두 달전 워싱턴시 한복판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

희생자는 주미대사를 지낸 일이 있는 칠레의 망명인사 레텔리에와 한 미국인 동료였다.

칠레 군사정부의 소행이 분명한 이 테러는 피노체트를 감싸 온 공화당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973년쿠데타 이후 13만명을 투옥, 고문하고 수천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인권탄압의 세계적 상징이 됐다.

모든 서방국가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비난하는 가운데 미국만은 그를 반공의 동지,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치켜세웠다.

그의 집권과정을 미국이 도왔다는 공공연한 비밀은 이제 미국의 비밀문건 해제로 밝혀지고 있다.

미국 정부의 비호를 과신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9월만 되면 피를 봐야 하는 광증이 생겼던 것일까. 대통령궁을 탱크로 깔아뭉갠 것도 9월이었다.

이듬해 9월에는 피노체트의 전임 참모총장 부부가 아르헨티나에서 자동차 폭탄테러를 당했다.

다음해 9월에는 이탈리아에 망명 중이던 칠레 정치인 부부가 총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이번에는 워싱턴에서 레텔리에가 자동차 폭탄테러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카터정부는 이 사건을 파헤쳐 칠레 정보부장 콘트레라스의 개입을 밝혀냈다.

피노체트 퇴출의 길을 후에 열어줄 1980년 국민투표도 미국 정권의 비호를 잃었기 때문에 국내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의 '우방' 독재자에 대한 태도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콘트레라스는 재판에 회부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은 칠레 법정에서 받았지만 증거는 모두 미국에서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근래 콘트레라스는 당시 정보부의 권력이 피노체트에게 있었고 정보부장인 자신은 그 하수인일 뿐이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보스가 물러나며 자기 앞만 가리고 졸개사정은 나몰라라 하니 졸개도 보스를 물고늘어져 자기 책임을 줄이려는 판이다.

그 바람에 피노체트 체포를 시큰둥하게 쳐다보던 미국에서까지 그 사법처리를 지지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깡패질을 하면서 의리조차 없다니 정말 한심하다.

쯧쯧.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