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또 김정일 입맛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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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묘향산 특각(별장)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남북관계 복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해 2월 이명박 정부 출범부터 계속해온 대남 비난과 군사위협을 1년 반 만에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그는 왜 이 시점에서 국면전환을 선택했을까. 또 현 회장의 방북을 계기로 삼은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우선 강경 일변도의 대미·대남 도발의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게 큰 요인으로 분석된다. 4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5월 핵 실험 감행은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움직임에 탄력이 붙게 했다. 1월 ‘대남 전면대결태세 진입’ 조치 이후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 같은 위협도 남한 정부와 여론을 흔들지는 못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지난 4일 평양을 찾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게 억류 미국 여기자 2명을 넘겨줌으로써 대미 유화제스처로 돌아섰음을 알렸다. 내친 김에 현 회장을 불러 개성공단 억류 근로자 유성진씨 문제를 털어냈다. 현 회장의 ‘청원을 풀어주는’ 방식을 택해 자신의 체면도 살리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발표되고 을지연습(17~20일)이 시작되기 전인 16일을 면담 시점으로 잡은 것도 절묘했다.

평양 내부의 복잡한 사정도 배경이 된 듯하다. 67세인 김 위원장은 지난해 8월 이후 건강이상에 시달려왔다. 후계자로 셋째 아들 정운(26)을 내정했다는 관측이 있지만 불안한 구석이 많다. 식량·비료 사정 등 경제도 헝클어졌다. 4월 시작한 경제증산 운동인 ‘150일 전투’도 다음 달 결산해야 할 판이다. 또 강성대국 진입을 공언한 2012년에는 정치·경제적 성과를 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와 마냥 등지고 지내다가는 남는 게 없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이런 김 위원장의 다급한 심사는 현대와 아태평화위원회가 맺은 합의문서 행간에도 드러난다. 지난해 7월 북한군의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 관광도 “(김 위원장의) 특별조치에 따라 편의와 안전이 철저히 보장된다”며 재개에 합의했다. 현 회장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란 언급도 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이런 태도변화를 놓고 비판도 제기된다. 핵·미사일 위협 등이 김 위원장 주도로 이뤄진 게 분명한데 이제 와서 자신이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는 모양새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북한군 최고사령부는 17일 을지연습을 비난하며 북한에 특별 경계태세를 내렸다.

사실상 당국 차원인 적십자 회담에서 다룰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현대그룹과 합의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유씨 석방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인도적 조치로 남측 정부의 상응조치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억류 중인 연안호 선원 4명 문제도 “통일부 당국자와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며 조만간 풀어줄 것임을 시사했다.

현대와 아태위 측의 합의 기조에 대해 정부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천해성 통일부 대변인)는 입장이다. 하지만 “당국 간 합의가 필요하다”며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자칫 공동보도문 합의 문구에 함몰돼 대북정책 기조가 흔들리는 모습으로 비쳐질까봐 신중한 태도다. 현 회장도 현대사업을 넘어선 합의내용에 부담을 느낀 듯 17일 오후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면서 당국과 협의해 추진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청와대와 통일부 일각에서는 ‘가을에 남북관계가 풀릴 것’이라던 예상이 현실화하는 것이라며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특히 대북정책 원칙을 고수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받고 싶어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조원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내건 대북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간엔 ‘비핵·개방 3000’의 틀에서 탈피하기 어려웠던 상황”이라며 “정부의 대북 접근 운신의 폭이 넓어진 형국”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거칠게 나오면 당국 차원의 특사를 파견하고 대북지원으로 달래 복원시키던 이전 정부와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을지국무회의에서 “흔들리지 않는 대북정책은 결국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란 것이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대중 정부 초기 햇볕정책에 극렬 반발하던 북한이 누그러진 것과 유사한 분위기”라고 풀이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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