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명예박사가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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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8일 일본 가고시마 (鹿兒島)에서 열리는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김종필 (金鍾泌.JP) 국무총리의 일본 방문 일정 중 눈에 띄는 게 한 가지 있다.

방문 마지막날인 30일 규슈 (九州) 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특강하도록 돼 있는 부분이다.

학위분야에 대해 규슈대측은 당초 정치학이나 법학 중 하나라고 밝혔으나 최근에는 분류 없이 수여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JP에게 명예박사 학위는 이번이 11번째다.

그것도 올 9월 28일 법학 (명지대) 을 시작으로 10월 경제학 (부산 동의대) , 11월 교육학 (공주대)에 이어 불과 두 달 남짓 사이에 각각 다른 분야에서 4개의 학위를 취득하는 셈이다.

한 사람에게 이처럼 분야별로 골고루 박사학위가 쏟아진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닐까. 이에 대한 JP 측근의 설명이 기막히다.

전국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는 '간청' 이 쏟아지는 바람에 이를 거절하느라 진땀을 뺀다는 것이다.

대부분 거절하지만 학교관계자와의 평소 친분이나 지역연고 등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만 고르고 골라 받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명예박사 학위는 '우리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특수한 공헌을 하였거나 또는 인류문화 향상에 특수한 공적을 나타낸 자에 대하여' 수여할 수 있도록 교육법 시행령에 규정돼 있다.

말 그대로 무엇보다 명예로운 학위다.

누구에게라도 자랑스러워야 할 명예박사 학위가 받는 사람은 귀찮아하고 주는 대학측이 오히려 안달이 나서 못 견디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 유명 사립대학의 보직교수는 명예박사 학위는 일정한 자격기준이나 심사과정이 없는 점을 노려 대학측에서 '정치적 목적' 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명예박사는 대체로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와 주겠다고 제의하는 경우로 나뉘는데 어떤 경우든 모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게 보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력 있는 기업가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기대하지만 권력이 있거나 명망 높은 인사의 경우도 음으로 양으로 영향력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고 학교 PR효과가 크더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명예욕이 강한 정치인들이 명예박사 학위를 선호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야당이나 야인 (野人)에게 주는 것은 눈치가 보이고 기대효과도 적어 자연히 권력을 쥐고 있는 현직고위층이나 여당사람들에게 학위가 몰리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영삼 (金泳三) 정권 시절 이른바 민주계인사들이 줄줄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박관용 (朴寬用.법학.동아대).최형우 (崔炯佑.정치학.동국대).황낙주 (黃珞周.정치학.한양대).황명수 (黃明秀.정치학.동국대).김정수 (金正秀.정치학.부산대) 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94년과 95년에 받았으니 집권 1~2년 뒤였다.

金전대통령 본인은 재임중 일곱 군데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모두 외국대학에서였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올 2월 경희대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부인 이희호 (李姬鎬) 여사는 5월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金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권노갑 (權魯甲) 전의원은 8.15특사로 복권된 직후 경기대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부라 하더라도 대학들이 박사학위를 유력인사 줄대기나 생색내기에 이용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더구나 현직관료나 여당정치인 등 힘 있는 인사들에게 명예박사 학위가 몰리는 것은 속보이는 짓이다.

대가나 보상기대가 없는 순수한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를 담보하는 보험이나 뇌물의 성격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국내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는 93년 대학자율로 바뀐 뒤 94년부터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93년까지 매년 30~40명이던 것이 95년 82명, 97년 1백14명으로 급증했다.

올해도 벌써 1백45명에 이르고 있고 내년에도 크게 늘어날 것이 틀림없다.

학연.지연 등을 유난히 내세우는 우리 풍토에서 자신에게 학위를 준 대학에 대해 초연하고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교세 (校勢) 확장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학측에 명예박사 학위의 '명예' 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다.

그렇다면 받는 사람들 스스로 그 명예를 지키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공직 재임 중 국내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는 사양하는 게 옳을 것 같다.

권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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