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영 기자의 장수 브랜드] 린나이 가스레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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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70년대 초반 한국 주부들은 연탄불 아궁이, 혹은 장작불로 요리를 했다. 도시에선 석유 곤로를 쓰기도 했지만 이 역시 기름 냄새가 나고 그을음이 생겨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역업을 하던 린나이코리아 강성모 회장은 일본에 드나들다가 일본 주부들이 가스레인지로 허리를 펴고 편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국내에도 도시가스가 보급되면 가스레인지가 잘 팔릴 것으로 보고 74년 일본 린나이와 합작 회사를 만들었다.

40여 명의 직원을 뽑고 프레스와 금형가공기계, 도장 설비를 들여놨다. 제품의 상판만 국내에서 제작하고,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방식으로 75년 국내 최초의 가스레인지를 내놨다. 도시가스가 가정에 공급되지 않을 때여서 일본 수출로 근근이 버텼다. 낭보가 날아든 것은 78년. 정부가 가스 연료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다.

이후 날개 돋친 듯 팔려 78년 4억여원에 그쳤던 매출이 79년엔 29억원, 80년엔 74억원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90년대 가스레인지 보급률이 95%를 넘어서면서 성장세가 주춤해지자 고급형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씩 국산 부품 비중을 늘리다가 이 즈음부터 완전한 독자 기술로 가스레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주로 쓰는 2구(불이 나오는 곳이 2개)와는 달리 국내용으론 3구를 개발했다. 냄비에 불이 닿는 면적을 고려해 화력을 가장 좋게 만드느라 동그란 화구의 크기를 달리해 수백 번 실험을 했다. 생선구이용 그릴 개발도 난제였다. 가스레인지가 너무 뜨거워지지 않게 열기를 빼면서 골고루 익게 만드는 것이 특히 어려웠다. 식빵으로 그릴 성능을 실험하고 나중엔 생선을 직접 구워봐야 했다. 한 달 이상 여러 종류를 굽다 보니 비린내에 질려 개발팀원들은 식사 메뉴로 생선이 나오면 꺼릴 정도였다.

린나이 임낙성 개발팀장은 “머리와 옷에 밴 생선 냄새 탓에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린나이 가스레인지는 외국산과 대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시장 점유율 50% 내외를 지켜왔다. 지금까지 2200여만 대를 팔았다. 가구당 1.42대꼴이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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