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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골프장도 로마로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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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사랑하고, 사랑한 만큼 볼 수 있다!’ 여행의 진리를 담고 있는 이 문장이 로마에서는 더욱 절실하게 와닿았다. 충분히 알고, 제대로 느끼며, 진실로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로마가 <벤허>를 연상시키는 거대 도시다. 하지만 역사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이들에게 로마는 허물어진 토담, 깨진 벽돌, 부서진 기둥들이 도심에 난무하는 <폐허>의 도시일 수도 있다. 아는 만큼만 보고 가게 되는 로마.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 14세는 로마에 와서 3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가는 여행자에게는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인사하고 몇 개월 이상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게는 “그럼 로마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다지 않는가.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역사의 도시인 만큼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수도 헤아릴 수가 없다. 대전차경기장 관련, 콜로세움 관련, 여러 황제 등과 관련한 ‘로마인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기억 속에 잔류하는 대표적 영화로는, 단연 <벤허>와 <로마의 휴일>을 꼽을 수 있다.

아카데미 11개 부문 수상, 10년의 제작 기간과 10만 명의 출연 인원,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필름을 소모했다는 대작 <벤허>. 대사가 한 마디 이상인 등장 인물만도 496명, 하이라이트인 15분간의 전차 경주 장면을 위해 1만 5천명이 4개월간 연습했다는 전설을 남긴 영화. 해상전과 전차 경주 장면은 영화사에 빛나는 명장면으로 많은 이들의 머리 속에 로마 제국을 형상화시켜준 작품이다.

그러나 ‘고대’ 이미지로 직결되던 로마를 ‘현대’적 감각으로 환기시키고 관광 상품화 시킨 공로자는 단연 <로마의 휴일>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로마를 <폐허>로 인식하는 이들조차 로마로 이끄는 홍보 수단이 되었다. 로마에 가면 스페인 광장에선 반드시 아이스크림을 먹고, 트레비 분수에선 동전을 던져야 하는 통과의례 코스를 만든 오드리 햅번. 그런 취지에서 햅번은 지금이라도 로마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도 오드리 햅번의 ‘로만틱 코스’를 하나씩 밟으며 로마 시내에서 동전 소비 의식을 이틀 간 치른 후 드디어 골프장으로 향했다.

로마 시내로부터 남쪽으로 불과 7km 내에 위치한 골프장 GOLF CLUB ROMA ACQUASANTA. 너무 가까운 탓에 도심형 허접 골프장이 아닌가 싶어 행선지를 바꿀까 고민했다. 그러나 2007년 골프다이제스트 선정, 이탈리아 4위의 골프장이라는 호텔 지배인의 추천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착하고 보니 신기하게도 도심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자연의 품이 느껴졌다. 클럽하우스 내부는 키 큰 아치형 통창이 쏟아내는 햇살이 광고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이 골프장 역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장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기에 다소 의아해서 지배인에게 물어보았다. 몇 일 전 피렌체에서 들렀던 Ugolino Firenze GC(1889)와 GOLF CLUB ROMA ACQUASANTA(1903)가 서로 이탈리아 최초의 골프장임을 주장하는 모양이었다. 공식적인 설립년도는 Ugolino Firenze가 빠르다. 하지만 GOLF CLUB ROMA ACQUASANTA가 1885년에 이미 비공식적으로 설립되어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제시하며 논란에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논란의 진위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이 어찌 되었건 지금 현재 우리 눈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따진다면 GOLF CLUB ROMA ACQUASANTA의 압승이었다. 이는 이탈리아가 아닌 ‘세계’ 최초의 골프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로마의, 로마에 의한, 로마를 위한 골프장임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오랜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주변 경관에 우린 한참을 넋을 놓았다.

지중해 소나무가 특유의 뭉게구름 모양을 자랑하는 가운데 유칼리 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가 멋지게 어우러진 코스. 그리고 그 수목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치형의 대형 석조 건축물... 그 위용은 7번 홀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간 중간 끊길 듯 이어지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건축물은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 정체는 로마 제국의 수로였다. B.C. 312~A.D. 226 1만 명이 넘는 인구가 모여 있던 로마에선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해주기 위한 수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골프장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 그리고 지명에 기인한 골프장명에 모두 ‘Aqua’가 들어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골프장이니 만큼 전장 길이는 길지 않았다. 5,854m의 전장은 장비 기술의 발달로 비거리가 늘어난 현대 골퍼들의 풀스윙에 박차를 가하지는 못하는 거리다. 아마도 GOLF CLUB ROMA ACQUASANTA가 1950년부터 80년까지 개최해오던 이탈리안 오픈 챔피언십을 중단하게 된 까닭도 거리 때문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굵직 굵직한 토너먼트들을 유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스는 부드러운 레이아웃의 파크랜드 스타일이었다. 페어웨이는 자연스러운 곡선이 살아있고 잔디도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높낮이를 바꾸며 페어웨이를 들락날락, 골퍼를 방해하기 때문에 체감 페어웨이는 더 타이트하게 느껴진다. 그린은 그다지 까다롭지는 않지만 사이즈가 작고 얕은 그린 벙커들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개울이 굽이쳐 흐르며 몇 몇 홀에서는 해저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골퍼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아 코스 매니지먼트 능력과 숏게임 기술이 필요한 코스였다.

골프장에 관한 한 마음을 비우고 있었던 이탈리아, 기대치 않게 로마에서 만난, 지극히 로마스러운 골프장이 더없이 고마웠다. 이탈리아다운 골프장 하나 찾아보겠다는 일념 하에 장화의 밑바닥까지 치고 올라온 우리. 결국 지중해는 골프장 환경에 걸맞지 않고 이탈리아에선 골프가 인기 스포츠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아쉬움을 달랬던 우린 드디어 로마에서 골프장 하나를 건진 것이다. 역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