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보면 보이는 청부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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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법률 전문가들은 ‘청부법안’인지 아닌지는 “한눈에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특정 부처의 업무 범위나 권한을 확대하는 법안이 ‘의혹 1순위’다. 연구소니 위원회니 하는 기관에 혜택이 돌아가는 법안이 의원의 이름으로 발의되면 일단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이런 법안은 정부 부처 차관이나 국장이 의원을 만나 부탁한 뒤 법안을 보내온다”는 게 한 의원 보좌관의 설명이다. 국회 법제실 박철호 국토해양법제과장은 “정부가 다른 부처와 이견 조정이 잘 안 되는 경우 의원입법으로 돌리곤 한다”고 설명했다.

국회의원실에서는 알기 어려운 전문 용어가 섞인 경우도 있다. ‘정비기반시설’ ‘용도구역’ 같은 용어들이 적재적소에 적확하게 쓰이면 십중팔구 ‘정부 솜씨’라는 것이다. 국회의 한 입법조사관은 “의원실에서 손수 만든 것 중엔 수필 수준의 어설픈 법안도 적지 않은 게 솔직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을 검토하는 국회 법제실 관계자는 “법안에 대해 의원실에 물어보면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경우가 있다”며 “아예 솔직하게 외부 인사에게 연락해 보라는 의원실도 있다”고 털어놨다. 정부 부처에서 집중 공략 대상으로 삼는 ‘법안심사소위’ 소속 중진 의원 등이 무더기로 법안을 제출하는 경우도 도마에 오른다.

문제는 의원이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 한 물증이 없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은 “17대 국회 때도 의혹이 드는 법안이 많았지만 정황만 가지고 지적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장영수(법학) 교수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낸 법안을 철저하게 평가해 법안의 시시비비를 가리면 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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