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에세이]예절 가르치는 러시아의 겨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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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러시아의 식당이나 공연장 등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싶은 공공장소에는 예외없이 '가르데로브' 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이 있다.

옷.장화.모자 등을 맡기는 곳으로 겨울이 긴 러시아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생겨난 공간이다.

두터운 옷과 장화.모자 등을 잔뜩 착용하고 영하의 거리를 다니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지만 난방이 잘 되는 실내에서 오랫동안 그 차림대로 머무르게 된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그래서 이러한 공간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곳은 러시아에서 '예절의 경계선' 역할도 한다.

겨울철 볼쇼이극장을 찾는 외국인 중엔 자신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터운 방한화를 착용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외국인들이 대부분 눈이 온통 뒤덮인 신발 그대로 공연장에 들어와 더러운 물을 질질 흘리면서 대리석 로비에 온갖 자국을 만들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를 깨닫곤 허둥대기 일쑤다.

러시아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이런 경우를 대비해 간편한 구두나 실내화를 준비한다.

만일 이 외국인이 두툼한 겉옷 속에 재킷을 받쳐 입지 않았다면 창피함은 두배가 된다.

공연장에 들어가려면 안내원들이 반드시 겉옷을 벗도록 요구하며 입장을 제지한다.

옆에 앉은 손님이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정장 차림의 인파속에 혼자 스웨터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창피함을 무릅써야 한다.

겨울철 러시아인들에게 '가르데로브' 는 신발을 갈아신고 모자를 벗으며 겉옷을 벗는 행동을 통해 예절을 실천하는 곳이다.

잔뜩 옷을 껴입어 퉁퉁해 보이는 러시아 여인들이 화사한 정장 차림의 미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러시아 겨울이 주는 생활의 지혜를 맛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김석호나(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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