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정책’ 파고드는 일본 주부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또 다른 주부 가와구치 유미코(37)는 민주당이 내놓은 육아수당 지원정책에 찬성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연말에 태어날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중학교 졸업까지 아이 한 명당 연간 31만2000엔(약 400만원)을 지급한다는 공약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출산수당도 55만 엔(약 700만원)을 받는다. 대신 연수입 500만 엔(약 6400만원)이상, 65세 미만의 자녀 없는 가구가 연평균 3만8000엔(약 48만원)의 부담을 지게 된단다. 하지만 출산·육아가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부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주부들이 총선에 관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경제문제다. 장기불황에 이어 지난해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장기적인 정책이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 때문에 총선을 20여 일 앞둔 요즘의 일본에서는 매니페스토 붐이 일고 있다. 언론들은 각 정당이 발표한 정책집을 분석하는 기획들을 내놓고 있다. 교육·연금·금융 등 항목별로 정책을 비교하고 현실성 여부를 철저히 따진다. 지난주엔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이 자민·공명 정권의 과거 4년 정책공약을 검증하는 자리를 열어 100점 만점에 46점이라는 낙제점을 매겼다. 2005년 선거 때 약속했던 항목들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선거를 코앞에 둔 집권당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이번 중의원 선거는 일본에서 매니페스토로 치러지는 세 번째 총선이다. 2003년 기타가와 마사야스 미에(三重)현 지사가 전국지사회의에서 “각자 매니페스토를 써보자”고 주창하면서 시작한 매니페스토 운동이 이제 일본 사회에 정착한 느낌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후보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대목을 묻는 질문에 6년 전에는 ‘후보 성품·이미지’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지만 지금은 ‘정책’이란 답이 1위다. 매니페스토 선거가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정당과 유권자의 관계가 변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당 대표나 후보자들이 유세 도중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한다)”를 연발하며 “활력 있는 고령화 사회를 만들겠다”는 추상적인 구호들을 외쳤다면 이제는 정책으로 승부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당과 유권자의 관계를 ‘부탁’에서 ‘약속’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당연히 비방·흑색 선전보다는 상대방 정책의 비현실성을 공격하는 정책대결이 대세다. 선거 막판까지 폭로전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가 뒤늦게나마 배웠으면 하는 대목이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