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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우리 사회과학 이대로는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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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에서 근대란 ‘사회’를 새롭게 발견한 시대다. 사회학은 물론 정치학·경제학 등의 기초사회과학이나 법학·경영학·행정학·복지학·신문방송학 등의 응용사회과학 모두 근대 및 현대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래전 사회학을 처음 배우게 됐을 때 가졌던 의문 중 하나는 사회(社會)란 무엇인가였다. 한자의 의미로 보자면 사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뜻한다.

‘사회’에 대응하는 서양어는 당연히 society다. 이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한 이는 일본 학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하는데 일본 학자들이 적잖이 곤혹스러워했다는 점이다. society에는 자율적 개인들이 맺은 계약의 의미가 담겨 있는 데 반해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는 개인이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가족 내지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사회’에 담긴 이런 개념사적 특징은 일본은 물론 우리 사회과학의 현재적 상황에도 여전히 되풀이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양 학문으로서의 사회과학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설득력 있는 전망을 도출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1997년의 외환위기에 대한 분석은 그 적절한 사례다. 한국 경제에 고도성장을 가져온 원동력 중 하나가 서구와는 달리 국가와 기업이 효율적으로 결합된 ‘한국형 주식회사’에 있었다면, 바로 그 한국형 주식회사에 내재된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특성이 외환위기를 가져온 원인 중 하나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서구의 교과서적 프레임으로는 한국 산업화의 명암을 제대로 분석하기 어렵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학을 포함한 우리 사회과학에는 여전히 서구적 이론과 한국적 현실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발견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현실이다. 60년대 산업화 이후 우리 사회과학계에서는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고 주체적 이론을 개발하며 자생적 재생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제를 실현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최근 학문의 세계화가 빠르게 강화돼 왔는데 우리 사회과학의 국제경쟁력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과학이 대전환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은 사실 적지 않다. 얼마 전 논란이 됐던 ‘미네르바 사건’은 그 상징적인 사례다. 이 사건에 담긴 의미 중 하나는 정보사회의 진전과 함께 전문적 사회과학자들에 의한 지식의 독점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사이버 공간의 다양한 카페와 블로그에서 진행되는 토론들은, 설령 학문적 엄격함을 다소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생생한 분석과 예리한 전망을 보여준다. 정보사회의 진전이 비(非)가역적인 한 제2, 제3의 미네르바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우리 사회과학의 대처다.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기적인 연구 기반을 조성하고, 현실에 내재된 한국적·서구적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측하며, 경제·사회의 세계화에 대응하는 학문의 세계화를 능동적으로 모색하고, 무엇보다 거시적 통찰과 미시적 분석을 겸비한 사회과학 후속 세대를 충실히 양성하기 위한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청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과 학회가 적극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우리 사회과학의 토착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성취하기 위한 자기 성찰, 교육 과정 개편, 정책 대안 개발, 시민사회와의 소통 증진을 모색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 역시 사회과학의 현주소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식기반사회로 빠르게 재편돼 왔음에도 정작 사회과학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현실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과학 진흥에 더욱 큰 정책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