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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문화유산답사기]제2부 9.표훈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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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강원도아리랑' 의 첫 구절은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로 시작한다.

그토록 금강산엔 절이 많았다.

불교가 버림받던 조선왕조 초에도 1백개가 넘은 듯 '신증 동국여지승람' 은 여전히 그 위치와 이름을 밝히고 있다.

지금부터 1백여년 전 비숍 여사가 왔을 때만 해도 55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역시 1백여년전, 광무 (光武) 3년 (1899)에 영호 (靈湖) 스님이 전지 반절 크기 (20호) 채색 목판화로 제작한 '금강산 4대사찰 전도' 를 보면 계곡마다 절간이고 봉우리마다 암자가 그려져 있어 그 진상과 가상을 가위 알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두가 옛 이야기로 돼 버렸다.

산중의 암자는 고사하고 4대사찰이라는 것조차 퇴락을 면치 못했다.

신계사는 무너져가는 3층석탑이 외롭고, 장안사는 빈터 뒤편에 돌부도 하나가 안쓰럽게 서 있을 뿐이며, 유점사는 폭격맞은 채로 잿더미에 덮여 있다.

오직 표훈사 만이 목숨을 건졌을 뿐이다.

금강산에 가기 전 금강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고 표훈사는 과연 어느 분이 산같은 공덕을 쌓았기에 살아 남았고, 그 지세가 얼마나 장하기에 모진 폭격을 받아도 다시 일어났을까를 신비로운 마음으로 헤아려 보곤 했다.

더욱이 표훈사 이외에 남아있는 정양사 (正陽寺) 와 보덕암 (普德庵) 도 표훈사의 한 말사이고 암자일 뿐이니 그 영험함은 경탄할 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표훈사에 당도했을 때 자연히 지세부터 살펴보았는데 깊은 산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넓은 터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절집이 안고 있는 품이 크고, 기댄 등은 두텁기 그지없으니 차라리 살아남지 않았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스럽다고 할 밝은 기상의 터전이었다.

육당은 표훈사의 이런 자태를 두고서 "옛 스님네들은 법안 (法眼) 뿐만 아니라 산수안 (山水眼) 도 갸륵하심을 알겠다" 고 했다.

표훈사는 참으로 정직하게 생긴 절이었다.

나는 아직껏 우리나라 산사 (山寺)에서 표훈사처럼 자신의 모습을 알몸째 드러내놓은 절은 본 적이 없다.

절마당을 반듯하게 닦아놓고는 맵시있는 7층탑으로 사뿐히 중심을 잡아두고 뒤쪽 산자락에 바짝 붙여 반야보전 (般若寶殿) 을 앉혔으며 그 좌우로 명부전과 영상전을 시립케 했다.

절마당 앞 턱은 낼 수 있는 데까지 바짝 내밀고 절문으로 삼은 능파루 (凌波樓) 와 절집의 사랑방인 판도방 (判道房) 은 아예 마당축대 아래쪽에 내려 지었다.

그래서 절마당은 한껏 넓은 채로 멍석자리 펴놓고 보란듯이 훤하게 펼쳐져 있다.

저쪽 모서리에 어실각 (御室閣)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뒤편에 칠성각을 모셨지만 모두 절의 그윽한 맛을 자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찰의 경내가 여기까지임을 은연중 내비치는 것도 같으니 어떻게 보아도 속을 다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

혹시 탑 좌우로 있던 극락전과 명월당을 복원하지 않아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지만 옛 그림을 보건, 옛 사진을 보건 표훈사는 반듯하고 환한 절간이라는 사실 만은 움직일 수 없다.

표훈사는 터가 반듯하면서도 주위의 산세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준봉 (峻峰) 들로 둘러쳐져 있다.

반야보전 뒤 북쪽으로는 청학봉 (靑鶴峯) 이 우뚝하고 왼쪽 동편으로는 오선봉과 돈도봉이 활모양으로 굽이치며 흐르고 오른쪽 서편으로는 천일대 (天一坮) 와 된불당이 높이도, 두께도 가늠치 못하게 치솟아 넘어간다.

산세가 이처럼 장엄한 중에 바위뿌리 기이하게 뻗어나오고 그 사이 솔나무 휘어 자란 모습은 아리따움을 넘어 교태스럽고 잔 기교까지 넘치는 것이니, 반야보전 팔작지붕 추녀가 제 아무리 날갯짓하고, 능파루 2층누각이 어중되게 호기를 부린다 해도 여기서는 모두가 귀여운 재롱으로 허용되는 것이었다.

때는 칠월하고도 보름도 다 되어가는 날. 한여름 장마철에 잠시 얼굴을 드러낸 푸른 하늘은 만천골 표훈동의 물빛만큼 푸른데, 꽃이라고는 노란 원추리가 축대 밑에서 부끄럼 타고 있을 뿐이니 천지 빛깔이 푸르고 또 푸를 뿐이다.

표훈사 절마당 한 가운데 서서 천일대에서 청학봉으로, 오선봉에서 돈도봉으로 푸른 산세에 휘감겨 맴을 돌며 눈 가는 대로 나를 맡겨 버렸다.

나는 그렇게 금강에 취하고 금강에 홀려 내가 지금 금강에 있음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만큼 지나서일까, 나는 반야보전 돌계단에 길게 걸터앉았다.

모든 절집에서 가장 마음 편안한 전망을 제공하는 곳은 부처님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는 자리다.

그렇게 멀리 앞을 내다보자니 남쪽으로 길게 늘인 곡선을 그리는 능선에 우묵한 고갯마루가 보인다.

나는 내금강 안내원 김광옥 (24) 동무에게 물었다.

"저기 움푹한 곳이 어딥니까?" "저기가 바로 배재령 (拜再嶺) 입니다. " "아니, 저기가 배재령이라면 방광대 (放光臺) 는 어딘가요?" "방광대는 요 오른쪽 천일대 위에 있죠. " "그러면 저 위가 정양사 (正陽寺) 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교수선생은 많이 아십니다."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옛날부터 내금강에 들어오다 보면 단발령 고개에서 머리 깎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또 저 배재령에 다다르면 저절로 큰 절을 두어번 하게 되어 배재령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고려 태조가 임금이 되고서 금강산에 왔을 때 저 배재령에 당도하자 멀리 방광대에서 법기 (法起 : 담무갈이라고도 부름) 보살이 그의 권속 1만2천을 거느리고 나타나기에 황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때 절한 곳을 배점 (拜岾) 이라고 했고,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 곳을 방광대라 이름짓고는 거기에 정양사를 지었다.

그리고 방광대너머 보살 닮은 봉우리를 법기봉이라 이름짓고는 표훈사 반야보전엔 법기보살을 모셔놓되 동북쪽 법기봉을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신증 동국여지승람' 에도 나오지만 1307년에 노영 (魯英) 이 제작한 '법기보살 현현도 (顯現圖)' 라는 칠병 (漆屛)에 그림으로 생생히 그려져 있다.

법기보살로 말할 것 같으면 '화엄경' 에서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라는 곳이 있어 법기보살이 1만2천 무리를 거느리고 상주하고 있다" 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때부터 풍악산.개골산이라 불리던 이 산을 금강산이라고 고쳐 불렀고, 그 봉우리를 1만2천봉이라 말하게 된 것이다.

표훈사는 이처럼 금강산 내력의 현장이며, 금강산 사상의 핵심처이고, 금강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금강산이 살아있는 한 표훈사는 건재할 수밖에 없는 지세와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나는 반야보전 돌계단에서 일어나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옛날 법당안 법기보살상이 향했을 그 쪽을 바라보며 만폭동 골짜기로 들어갔다.

*다음 회는 "정양사와 겸재의 '금강전도' " 편입니다.

글=유홍준(영남대 교수·박물관장)

사진=김형수(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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