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통령의 일본방문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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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도쿄 (東京)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자신감의 표현을 통해 신뢰의 실마리를 푼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변화가 일본을 선도하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일본의 오부치 (小淵) 내각이 과거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 을 공동선언문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는 한국의 변화를 읽고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표명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오부치 정권은 전후 (戰後) 최악의 경제위기에 몰려 언제 중의원을 해산하고 언제 총선을 치러야 할지 모를 만큼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자민당 내부의 우파뿐만 아니라 정.재계 우익인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죄를 선언문에 담은 것은 정치적 모험이기도 하다.

과거역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 수준은 한국인의 감정에서 볼 때 결코 흡족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는 '천황제' 아래서 일본정부의 책임자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金대통령이 취한 '일본천황' 의 방한 (訪韓) 분위기 조성과 대중문화 개방, 어업협정의 정치적 타결 등 단계적 조치들은 오부치 총리의 정치적 위험요소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만약 그가 여론의 구석에 몰린다면 한국은 일본의 자민당 정권뿐만 아니라 더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제1야당 민주당과 대화하는 데 새로운 장벽을 만드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늘 시끄러웠던 양국협상의 도마 위에서 껄끄러웠던 문제가 사라지고 경제.문화 협력의 질적 향상 등 21세기 현안들이 올라가게 된다.

이 문제들은 우리들의 자세 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한국의 큰 착각은 늘 일본이 각 분야에 걸쳐 먼저 성의를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신뢰성을 시험한 뒤 실행에 나선다.

외교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책임자의 자리바뀜에 따라 입장이 달라져 기존제도가 '보장성' 이 없다고 의심해 왔다.

역사에 관한 한 일본인의 잘못된 역사인식이 시정되도록 시민그룹과 학자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

한국이 앞서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7일 도쿄에서 열린 한국투자환경 설명회에는 입추의 여지 없이 일본경제인들이 몰렸다.

그들은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혁조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기업의 인수.흡수합병, 토지취득, 노동문제 등에 대한 신뢰만 쌓인다면 언제라도 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과거 일본기업들의 한국투자 실패사례로 인해 축적된 선입감을 씻어 내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의 높은 신뢰도가 불가결하다.

기업들이 국가를 선택하는 경향은 일본에서 더욱 강하다.

일본경제인들은 제도의 개선이 더디고 세계의 변화에 둔감한 관료와 정치권의 무기력증에 환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매력은 속도감 있는 정책결정이다.

각종 제도와 국민 및 관료들의 의식이 국제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일본의 한국투자는 놀랄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보여 준 한국의 변화와 신뢰가 일본을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고 있다.

최철주 본사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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