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몰리는 일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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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일본경제가 결국 세계 경제의 '시한폭탄' 이라는 오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세계 경제가 더욱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 일본 탓이라는 비난이 53차 IMF총회장에 가득했다.

아시아에 3백억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좋지만 그 보다는 일본경제 자체의 회생이 화급하다는 것이 세계적인 주문이다.

경제의 체온계인 주가는 7일 폭등에도 불구하고 12년반만의 최저치인 1만3천엔대에 걸쳐 있다.

나카무라 유지 (中村勇二) 신일본증권 투자정보부장은 "금융안정.경기부양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조속히 시행되지 않으면 일본발 (發) 세계공황은 피할 수 없다" 고 경고한다.

일본 경제위기의 뿌리는 87조엔에 달하는 불량채권. 특히 장기신용은행이 사실상 파산처리되면서 금융시장의 신용질서가 붕괴되는 국면이다.

일본은행이 단기금리를 낮추고 통화공급량을 늘여도 자금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채권시장쪽으로만 흐르고 있다.

일본 19개 대형은행들은 올 하반기에 대출을 10조엔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연리 1%를 밑도는 초저금리 상황에서 은행들은 돈장사에는 관심없고 일단 안떼이고 보자는 쪽이다.

부실징후가 있는 기업에 가차없이 대출금을 회수하면서 매달 1천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완전실업자는 2백97만명을 웃돌고 있다.

금융불안은 실물경제를 파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을 당초 1.9%에서 마이너스 1.8%로 수정했다.

전후 첫 2년 연속 마이너스성장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은행대출이 10조엔 줄면 일본의 성장률은 0.5%포인트 하락한다.

또 소비수요는 냉각되고 기업의 설비투자도 주저앉고 있다.

일본 정부 추산에 따르면 올해 민간수요는 공급보다 무려 20조엔 모자란다.

아무리 물건값을 내려도 이 격차를 메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경제의 위기를 알리는 또하나의 징표는 주가하락. 8월 이후 외국인 투자가들은 소니.혼다자동차.캐논등 우량주를 중심으로 8천8백억엔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주식보유비율이 42.1%에 달하는 기관투자가들도 현금확보와 보유주식 평가손 방지를 위해 무차별 매도에 나서고 있다.

니케이 평균주가가 1백엔 하락하면 대형 19개 은행의 자기자본은 2천5백억엔씩 줄어든다.

또 주가폭락에 따른 주식평가손으로 닛산자동차가 2백50억엔, 신일본제철이 2백억엔의 적자를 내는등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따라 지난 4월 16조엔규모의 종합경기대책을 내놓은 지 6개월만에 다시 10조엔 규모의 추가 대책을 검토할 만큼 다급하다.

지난 7년동안 80조엔을 투입했지만 때늦은 처방으로 경기회복에 실패한 일본정부는 이번 추가 경기부양책은 한달안에 끝낸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구도가 걸림돌이다.

민주당등 야당이 의회해산과 총선거를 요구하고 있는 데다 자민당의 위상 추락으로 오부치총리의 정치지도력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 일본 금융기관들의 자구 몸부림 = 금융기관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도쿄미쓰비시은행과 후지은행은 옛 미쓰비시그룹과 야스다그룹의 금융계열사들을 끌어 안았다.

장기신용은행도 일시 국유화를 거친뒤 스미토모신탁은행에 합병될 전망이

고, 장기적으로는 스미토모은행이 스미토모신탁과 다이와증권까지 흡수합병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투자신탁등 새로운 금융기법을 배우기 위해 외자계와의 제휴도 일반화되고 있다. 일본 주식거래시장의 35%를 이미 외국계 증권사들이 점유한데 이어 다이이치간쿄 (第一勸業) 은행은 미국의 JP모건, 닛코증권이 트래블러스그룹과 합작회사를 설립키로 했다.

토종기업간의 전략적 제휴도 활발해 도카이은행이 중견시중은행인 아사히은행과 합병키로 했고 고교 (興業) 은행은 노무라증권과 제휴를 맺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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