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대승적 방일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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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가닥의 띠와 같은 좁은 냇물이나 바다를 사이에 둔 가까운 이웃관계. 이것이 일의대수 (一衣帶水) 의 사전적 의미다.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의 조건을 갖춘 두 나라다.

고대의 한.일관계가 실제로 그랬다.

367년 백제와 일본의 야마토 (大和) 조정이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고 선진국이던 한반도에서는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활발한 기술이전이었다.

특히 5세기말 치열했던 중앙호족간의 권력투쟁은 한반도 출신의 뛰어난 기술관료들을 누가 포섭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정도였다.

94년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의 방일 (訪日) 때 히로히토 (裕仁) 일본천황이 만찬사에서 6~7세기의 일본국가 형성기에 '다수의 귀국인 (貴國人) 이 도래해' 학문과 문화와 기술을 가르친 사실 (史實) 을 지적한 것도 이런 관계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는 한국과 일본의 악연으로 개막됐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과 20세기의 첫 10년에 일본은 독점적인 한반도 지배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한국 유린으로 시작된 한.일관계의 20세기는 두 나라의 화해로 21세기를 맞을 것인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 성과에 대한 두 나라 국민들의 관심은 비상한 것 이상이다.

징조는 좋다.

金대통령 스스로 이번 방일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는 20세기의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준비한 것 같다.

73년 일본에서 일어난 자신의 납치사건을 거론하지 않고, 일본국왕을 천황으로 부르고, 방일 직전 타결된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라는 뜨거운 감자를 비켜 가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렇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한국과 일본이 전략적 파트너가 될 기회가 올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金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빈 손으로 돌아온다면 한.일관계는 더 후퇴할 위험이 크다.

한.일관계에 관한 한 현안이 아무리 많아도 문제의 핵은 과거에 대한 사과다.

이 문제는 한.일관계의 기반시설 같은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현안이라도 타결 직전이나 직후에 두 나라중 어느 한쪽의 감정적 여론에 밀려 원점으로 돌아가게 돼 있는 것이 한.일관계의 특징이다.

일본 사람들의 셈으로는 일본이 지금까지 16번 이상 사과를 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사과의 횟수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다.

거기에다 한국인들의 오장 (五臟) 을 긁는 망언 한 마디로 사과 열 마디를 날려 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과문제에서 전향적일 필요가 있다.

모든 한국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과는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그만 됐다" 고 매듭을 짓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번에 일본의 사과는 95년 무라야마 (村山) 총리의 성명 수준을 넘을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받아들이고 인적 교류와 경제협력 같은 실질관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짐스러운 대일 (對日) 콤플렉스를 벗고 대승적 자세로 일본을 대해 일본인들이 혐한 (嫌韓)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게 하자. 이성 (理性) 이 잠들어 있으면 정상회담이 무슨 소용인가.

일단 '개념적인 돌파구' 를 찾아야 한.일교섭이 국민감정이라는 부담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20세기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워 한 세기를 고통스럽게 보냈다.

21세기로 가는 버스에서 중간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서는 金대통령이 이해집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본지도자들을 만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정상회담후 발표될 '21세기 파트너십' 의 공동선언은 한.일간 화해를 넘어 21세기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공동번영의 이정표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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