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이시대의 슬픔 노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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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가 빚어낸 비극적 군상 (群像) 인 노숙자들. '어제' 까지 생업을 유지하다 이런저런 사유로 길가에 나선 노숙자들이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9개월이 흘렀다.

별로 나아질 게 없어 보이는 그들의 삶 앞에 이제 겨울이라는 불청객이 또다시 다가오고 있다.

이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취재팀은 9월 16일부터 21일까지 5박6일 동안 노숙생활을 체험했다.

"집있는 사람은 지금이 가을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금부터 겨울이야. 밤에 한번 자봐.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는데 어떻게 하지…. "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발표했지만 제대로 된 게 뭐야. 서울역에 1만명 정도 모여야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거야. " 노숙을 시작한 16일 저녁 연세재단빌딩 앞에 앉아 있던 노숙자들의 대화 내용이다.

첫날부터 그들의 회한과 응어리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성이 金씨라고 한 50대 노숙자에게 "추석때 고향에 갈 겁니까" 라고 물었으나 "가긴 뭘 가" 라며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노숙 첫 밤, 예상대로 간단치 않았다.

서울역 대합실 안에서 눈을 붙였다고 느끼는 순간 고성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오전 5시30분쯤. "내가 개요. 왜 발로 차는 거요. " 한 노숙자의 항의에 경비원은 "발로 차긴 무슨 발로 차. 그냥 일어나라고 한 거지" 라고 응수한다.

이 노숙자는 "아무리 우리가 노숙자라 하더라도 그러면 안돼" 라고 목청을 돋우다 대합실 밖으로 나갔다.

이날 용산역 광장에서 점심을 먹던 중 "팍" 소리와 동시에 "억"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술에 절어 주위에다 시비를 걸던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주먹세례를 받고 고꾸라졌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데 왜 부채질하느냐' 고 분개한 다른 노숙자에게 당한 것이다.

노숙 3일째인 18일. 점심후 남산공원에서 낮잠을 자 피로를 풀었다.

근처에 있던 한 노숙자가 "노숙 3일째 서부역에서 술에 취한 채 자고나니 1백50만원과 주민등록증이 든 지갑이 없어졌다" 고 하자, 다른 노숙자는 "주민등록증을 30만원에 팔라는 제의를 해오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고 거들었다.

저녁에 서소문공원에서 만난 60대 초반 노숙자에게 "연세가 상당히 드신 것 같은데 가족은 어떻게 됐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것은 묻는 것 아닌데…" 라면서도 내력을 약간 털어놓았다.

"실은 내 동생이 시내 유명 음식점 주인이야. 딸은 음악가이고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갔지. " 그러면서 그는 "요새는 그냥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는데, 아침이 되면 또 눈이 떠지니…" 라며 한숨을 지었다.

실직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추위도 추위지만 부랑자와 함께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현실. 함께 있었던 양모 (45) 씨는 "우리가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지 모르겠다" 며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부랑자들에 대해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19일 오후 9시쯤 서울역 1호선 방향 지하도로 돌아와보니 엉망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노숙자들이 취한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잠시후 그중 한 명이 한쪽 벽에다 방뇨를 하자 오줌이 다른 노숙자 자리로 흘러갔다.

인근 식당 근처 지하도 중앙엔 초등학생도 안돼 보이는 어린 남매가 팬티만 입은 채 누워 있었다.

"애들 아빠가 돈을 가방에 두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려 화풀이로 저러는 것 같다" 는 게 식당 주인의 설명이었다.

부모의 '파산' 으로 애들까지 저 고생을 하는 모습이 서글펐다.

20일은 일요일이라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교회순례' 에 나섰다.

교회별로 몇천원씩 돈을 주고 식사도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기자도 몇몇 노숙자들과 함께 흑석동에 있는 남석교회로 향했다.

예배후 교회 관계자가 입구에서 봉투를 전달해주었다.

액수는 2층에 있으면 2천원, 1층에 있으면 1천원.

"왜 차이를 두느냐" 고 한 노숙자에게 물어보니 "일찍 오고 늦게 오는 차이인 것 같다" 고 답했다.

노숙사회에선 이름.전직 등은 묻지 않는 게 불문율. "성 (姓) 은 '노씨' 고 가진 것은 시간뿐" 이라는 농담이 나돌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한데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역 근처 모교회의 허락을 얻어 이 교회 공터에서 텐트생활을 하는 노숙자들의 모임이 대표적 사례다.

리더인 李모씨의 엄격한 통제 아래 생활이 이루어지는 이곳은 술먹고 숙소에 돌아와 주정을 부리면 '퇴출' 당한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21일 오전엔 폭우로 변했다.

저 비가 이곳의 회한.고함.주정.분노를 씻어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서울역을 떠났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안희창.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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