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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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햇살에 그을린 피부이긴 하였지만, 갸름한 얼굴에 맑은 눈은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승희라는 여자의 매력은 궂으나 개나 그처럼 즐겁게 살고 있는 데서 풍기는 것 같았다.

좌판으로부터 십미터 이상을 접근해선 안된다는 윤종갑의 엄중한 만류가 없었던들 배완호는 아예 그녀의 좌판 가까이 가서 빤히 쳐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좌판이 있는 차일우산 곁에는 이동순님의 '장날' 이라는 시가 전시되고 있기도 했다.

물건을 팔러온 장돌뱅이가/물건을 사기도 하는 장날/고추 팔러온 사람이/실타래를 흥정하고/참기름 짜러온 사람이/강아지를 파는 동안/악다구니로 보채던 어린 것은/에미 등에 업혀 한껏 잠이 달다/신새벽 해돋기 전부터 몰려와서/젖은 장바닥에 들끓는 삶의 거래/머리에 수건 한 장 둘러쓰고/결 고운 인심을 주고 받는 아낙네들/수염이 허연 영감이 한복을 차려 입고/점잖게 붓 벼루 팔고 있는 시장골목/묶여서도 싱싱한 배추들의 생기와/강엿가루 반짝이는 목판을 지나오면/한 손에 굵은 소금을 담뿍 움키고/생선에다 기운차게 뿌리는/어물전 곰보/해지고 장 보는 이도 뜸한데/뚱뚱한 돼지집 여편네의 손목을 잡고/거나하게 저물어가는 가을 주막/내일도 붐비는 타관의 장터로 찾아가서/맑은 봇짐 끌러놓을 장돌뱅이가/꿈에서도 콧노래 흥얼거리는/시골 장날.

좀더 가까이 가서 그녀를 훔쳐보고 싶은 욕구는 굴뚝 같았으나 한 번이라도 수작을 건넸다간 그땐 장터마다 미행하고 다녔던 사실이 들통날 것이 뻔했다.

그녀의 좌판에 어떤 여자가 나타난 것은 의성 인근의 장터를 한 파수 돌아서 안동장으로 복귀했을 때였다.

먼발치에서 보건대, 나이는 스물너덧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 여자가 나타나자, 황태전에서 싸구려를 부르고 있던 태호가 달려 왔다.

태호는 퍽이나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찾아온 여자는 난처한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서울의 송은주를 안동까지 불러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승희가 그녀와의 연락을 계속했던 결과였다.

이른 아침에 청량리를 떠나 안동 장터 맥반석구이 좌판까지 정확하게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승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의 덕택이었다.

태호는 배가 고프다는 그녀를 데리고 인근의 다방으로 향했다.

안동장까지 찾아오는 성의까지 보이는 송은주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2층 다방의 계단을 오르면서, 안동에서 유명한 건진국수나 헛제사밥을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보채는 은주에게 태호는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앉으려니 제 몸의 땀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송은주를 또다시 만나다니. 탐탁잖은 기분이 들었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해질 무렵인데도 다방 안은 열기가 후끈했다.

은주가 조그만 색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콧등에 뭐가 묻었네요. " 태호는 손수건을 건네 받아 그것을 닦았다.

손수건에 묻은 희미한 향수냄새가 신선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요. 선배 혼자 두고 왔거든요. " 송은주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레지가 놓고간 차림표를 읽고 있었다.

"밤기차로 올라갈 거죠?" "그게 좋겠어요?" 이번엔 태호가 침묵했다.

헷갈린다는 게 이런 경우를 이르는 말 같았다.

아침에 떠나서 저녁차로 되돌아가려고 서울을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곧장 되돌려보낸다고 호락호락 돌아갈 여자도 아닐 것이고, 태호 역시 이번에는 너무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지난 여름 낙산에서처럼 좋지 않은 기분으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민주도 주저하고 있는 태호의 속마음을 읽은 듯 더 이상 캐고들지 않았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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