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미래 내다보는 개혁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우리는 지금 6.25 이후 최대국난을 겪고 있다.

경제는 - 6~7%의 역성장에 실업자가 1백65만명을 넘어 곧 2백만명 수준을 내다보고 있다.

생산설비 가동률은 60%대로 떨어져 이러다 경제기반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세계경제의 어려움과 겹쳐 제2의 외환위기를 걱정하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한 우리의 처방은 적절하며, 지금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불행히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그렇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공원과 역사 (驛舍)에는 노숙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길에는 다시 승용차행렬이 넘쳐 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초기의 긴장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살아나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개혁과 구조조정도 자기희생과 통합이라는 추진력보다는 분열과 대립이라는 제동에 너무 빨리 부닥치고 있는 것 같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그 지향점과 수행방법이 사회적 합리성을 지닌다는 넓은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정치개혁을 내건 정치인 사정은 단기적으로 정치의 실종을 가져왔다.

사정대상이 된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반발은 이미 계산된 것이겠지만 문제는 그 의도와 공정성에 대해 국민의 폭넓은 납득을 얻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선거로 당선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남의 돈을 받아 정치를 해 온 상황에서 사정대상에 야당소속이거나 평소 밉보였다는 정치인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정치를 고쳐보자는 정치개혁에 과거지향적인 사정을 주무기로 삼은 것 부터가 원천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사정이란 과거 정치의 대표적 비리를 드러냄으로써 고작 정치개혁의 당위성을 뒷받침할 수 있을 뿐이다.

국난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하겠다는 경제청문회도 결국 과거에 대한 책임.비리공방으로 흘러 미래 경제 살리기에 집중돼야 할 힘만 분산시키게 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 꽤 있는 게 사실이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지역대립구도도 아직은 완화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IMF사태로 중산층이 무너져 사회구성이 20%의 전문직종사자와 80%의 최소생계유지자로 재편된다는 이른바 '80:20사회' 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고도 이를 헤쳐 나갈 원동력이 될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국민적 통합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경제.사회.지역적으로 분열과 대립이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 선진국을 향해 우리의 저력을 결집하기 위해선 분열과 대립이 아닌 화해와 통합, 과거지향이 아닌 미래지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선 정치개혁이 급선무다.

비용이 적게 드는 정치가 돼야 한다.

국회의원수를 대폭 줄이고 정당구조와 선거운동에 돈이 적게 들도록 하는 제도개혁이 시급하다.

의원총수를 줄이고도 비례대표의 비율을 늘려 각계 전문인력 등 새로운 피를 수혈함으로써 인적 개혁도 해내야 한다.

특정 정당의 지역별 독식 (獨食) 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두어 정당간 지역대립도 완화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당직 및 공직후보의 상향적 선출 등 정당내 민주주의가 정착되도록 하는 것이 정치개혁의 관건이다.

경제에서는 정부와 대기업이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고 시정하는 것을 기초로 해 시대적 과제인 구조조정을 확실하고 과감하게 밀고 가야 한다.

구조조정에는 고용조정과 임금조정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희생의 분담 없이는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그 대신 기업은 투명성 확보, 산업구조조정, 부실기업의 과감한 퇴출 등의 부담을 적극적으로 져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서도 안보태세를 확고히 하는 전제 위에서 교류.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남북한간에도 역시 분열과 대립은 최소화하고 화해와 통합기조를 극대화해야 한다.

새 정부의 '햇볕정책' 은 이를 지향하고 있지만 아직은 확고한 안보태세란 전제에 대한 폭넓은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사회적으로는 '80:20사회' 의 특징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직업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대립이 우려된다.

실업자의 급증은 범죄의 증가, 사회의 폭력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거의 불모상태인 사회복지의 현실이 사태를 더욱 나쁘게 하고 있다.

복지제도는 돈이 남아 실시하는 제도가 아니다.

영국은 2차세계대전의 폐허 위에서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도 이제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체제에 대한 신뢰를 확산시켜야 한다.

망국적 지역대립의 근본적 완화는 집권자를 낸 지역에서 그 명예로만 만족하고 현실적으론 손해를 봐도 좋다는 의식이 넓어질 때라야 가능할 것이다.

개혁과 구조조정은 시대의 화두 (話頭) 다.

우리는 이 개혁이 국민적 화해와 통합을 목적으로 미래를 향한 비전을 담을 때 기필코 성공하리라 믿는다.

창간 33돌을 맞는 중앙일보는 개혁이 미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하고 유도해 나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배전의 관심과 질정 (叱正) 을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