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은의 북한탐험]6.천지 上.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어두운 시대 한 시인은 백두산에 올라 "조선은 백두산을 잃어버렸다" 고 한탄했다.

그래서 현대사는 잃어버린 백두산을 찾아내는 역사인가.

그것이 1945년의 조국 광복이었고 그것이 2000년대에 올 겨레의 수고 많은 통일인가.

지난 날에는 백두산 연봉을 흔히 16봉으로 말했다.

천지에 제 몸을 직접 담근 봉우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연봉들과 얼마쯤 겹친 것까지 아울러서 2천5백m 이상의 23봉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것으로도 당치 않아서인지, 연봉들의 높고 낮은 것을 눈여겨보면 30봉이 넘기도 한다.

그토록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기상은 각각 치열하다.

천지라는 여왕을 위한 친위 (親衛) 의 성벽이겠지만 저마다 서로 닮지않으려는 독자적인 형상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연봉들은 장차 올 커다란 활동을 앞두고 정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연주 (演奏) 직전의 숨죽인 무대와 청중의 고요처럼. 나는 그런 팽팽한 예감 가득히 그 산등성이의 현무암 표층과 땅속 마그마가 솟아오르며 기체 (氣體) 와 섞였던 수많은 뜬 돌들이 널린 지대가 그냥 죽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백두산은 지구물리학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폭발의 가능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럴진대 백두산이 아니라도 이 세상은 무엇 하나 불안의 역외 (域外)가 아니다.

장군봉은 빙하가 깎이면서 이뤄졌기 때문인지 유달리 험하고 급하다.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아주 넉넉한 늙은 맹수 등짝 같은 등성이 가장자리가 칼날처럼 서슬져 곧장 저 아래 천지로 꽂혀버린다.

왼쪽으로 해발봉.단결봉이 있고 제비.관면.와호.낙원.제운봉이 있다.

몇개는 옛 이름이 아니었다.

장군봉 바른 편으로 향도봉.쌍무지개봉.자암봉들이 있다.

그 북쪽 화개.천문.철벽.용문.금병.지반.백운.옥주봉들이 중국 쪽이다.

지나치게 웅장하면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묻혀버린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백두산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장군봉에서 조심스레 내려와 천지 복판으로 나아가다 멈춘 비류봉 동쪽에는 지난날 불맥 또는 노루목이라고 불렀던 비탈이 있다.

그것조차 45도 경사인데 유일하게 천지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장군봉과 여러 봉우리들은 아침 30분 동안 제 얼굴을 보여주고 나서 다시 구름장의 두꺼운 장막 속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내려가 만난 천지는 온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전혀 딴 세상이었다.

천지 물은 시리디 시린 잔 물결 밑으로 투명했다.

심봉사가 방금 눈뜬 것 같았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천지 (天池) 를 대지 (大池) 라 했다.

이와 상관없이 전하는 바로는 중국 천자 (天子) 의 '천' 을 감히 쓸 수 없다 해서 오랫동안 그랬다 한다.

또한 예로부터 천지는 용왕담 (龍王潭) 등 다른 이름이 있다.

천지 물은 바람과 함께 실컷 노닐 때는 파도 1m 이상이기도 하다.

그런 파도가 딱 멈춰서 서울 여의도만한 그 물이 일시에 거울의 액면이 될 때가 있다.

백두산 전문 사진작가들은 바로 그 거울 같은 수면을 찍기 위해서 갖은 고생으로 벼랑에 눌어붙어 대기하기도 한다.

천지는 오직 하늘하고만 상종하고 있었다.

저 위의 연봉들이나 그 연봉 너머 세속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지고 (至高) 의 무심만으로 세월을 길러내고 있었다.

거기 꽃밭이었다.

황량한 화산회토인데도 제 동산으로 삼고 꽃의 융단을 깔아놓고 있는 그 만원사례 같은 절경에는 그 누구인들 풀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산이란 무릇 풀과 나무로 제 알몸을 덮고 있거니와 옛 책 '박물지' 는 '땅은 이름있는 산을 보좌 (補佐) 로 삼고 돌을 그 뼈로 삼으며 시냇물을 혈관으로 삼고 풀과 나무를 털로 삼으며 흙을 살로 삼는다.

땅 표면에서 3척 위가 기 (氣) 이고 3척 아래가 비로소 땅이며 이는 음기 (陰氣)가 쌓인 곳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롯되는 한반도 백두대간의 여러 산들은 그 조종인 백두산과 함께 한민족의 강토를 존속시키는 보우 (保佑) 를 맡고 있다.

향도봉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가벼이 현기증이 있을 만했다.

재일 조총련 계열의 실적으로 가설된 것이었다.

마치 방금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 같은 용암 퇴적과 쏟아져내릴 듯한 석해 (石海)가 소름 끼치도록 멈춘 채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그럴 따름이었다.

일체의 정 (情) 이 배제되었다.

있는 것은 오직 무정뿐이었다.

비탈의 아랫부분은 일종의 툰드라토 (土) 인데 천지에 내려오기 전의 해발 2천4백m 지대에 해당하는 지의류 (地衣類) 와 이끼류, 그리고 앉은뱅이 풀밭이 파란 빛깔의 요염한 육신의 융단을 깔아놓았다.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다만 쇠빛 혹은 암갈색.적갈색 바위와 푸석푸석한 암질에 길들여진 내 무미건조한 눈이 돌연 선열한 생명감으로 빛날 수 있었다.

꽃밭이었다.

그 초원지대가 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꽃을 위한 것이었다.

정녕 갖가지 꽃들이 천지 물 기슭까지 돌아가며 꽃밭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위 틈이나 도석퇴 (倒石堆) 돌 위에 억척으로 피어 있는 한 송이 두메양귀비 노랑꽃의 그 나비 같은 외로움이 절로 눈물겨웠고 담자리꽃도 두런두런 피어났지만 좀 쓸만한 지대로 내려가자 거기는 온통 큰오이풀 군락지로 되고 보랏빛 하늘매발톱꽃도 누이들 같은 바위구절초도 가득히 피어 있었다.

실로 꽃같은 세상이 거기 있었다.

바위 꽃밭에는 바위돌꽃이요, 흰 산용담꽃은 여기저기 추운 손님이었다.

그런가 하면 분홍빛 좀참꽃 융단은 거기에 발을 디디기에도 송구스러웠다.

그러다가, 내가 감히 천지란 (天池蘭) 이라고 이름붙인 오랑캐장구채의 그 전아한 기품의 흰 빛 꽃술과 극명한 잎새를 만나면 이런 곳에서도 웬 서권기 (書卷氣) 와 문자향 (文字香) 의 선비가 허용될 듯했다.

하지만 그 꽃들은 어서 그 꽃의 일생 끝에 열매 맺어 다음해 제 철에 이르기까지 그 엄혹한 추위와 얼음을 아무 데도 알리지 않고 감당하는 모진 생명의 힘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 '자연 의지' 야말로 인간의 '권력 의지' 이상임을 깨쳐야 했다.

사람이란 이런 극한에서의 삶을 모르고 삶일 수 없다는 처연한 자각이 있을 법하다.

제가 살고 있거나 제가 이룩한 안락한 경계를 넘어 그 '경계 표시' 밖의 보장되지 못하는 새로움이란 이렇듯이 천지 물가에서 하나의 재생이다.

글 = 고 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