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여당무죄 야당유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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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선거사범이니 사정이니 하며 정치인들을 자주 불러들이더니 법원.검찰이 오히려 정치판에 오염돼가는 느낌이다.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판.검사들마저 정치적 사건만 만나면 앞뒤가 맞지 않거나 게걸음하기 일쑤다.

때로는 얼마나 국민들을 우습게 봤으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은 느낌도 든다.

법원의 홍문종 (洪文鐘) 의원 선거법위반 사건 처리가 한 예다.

洪의원의 1심 형량은 벌금 2백만원이었으나 항소심에서는 벌금 80만원이 선고됐다.

그는 선고 열흘전 야당을 탈당해 여당 입당설이 나도는 중이었다.

선거법위반으로 벌금 1백만원 이상이 확정되면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벌금 2백만원과 80만원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의원직이 생명인 국회의원으로서는 유.무죄의 차이와 다를 바 없다.

洪의원 사건은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여서 일반 사건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국민회의측이 재정신청을 내자 법원이 혐의를 인정해 특별검사를 임명했던 것이다.

결국 법원이 유죄라고 기소토록 시킨 뒤 스스로 '준 무죄' 를 선고한 우스운 꼴이 됐다.

1심에서 벌금 1천만원이 선고됐던 자민련 김고성 (金高盛) 의원에게 항소심에서 벌금 80만원을 선고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의 10분의1도 안되는 벌금으로 감해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1심은 金의원이 야당 시절이고 항소심은 여당이 된 후 선고됐다.

어찌 보면 의원직을 유지시키기 위해 재판부가 묘수찾기를 했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두 재판부 모두 '법과 양심' 에 따라 '벌금 80만원짜리 법리 (法理)' 를 구성했을 것이다.

또 재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사법권 침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사건일수록 잘 짜인 법이론보다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는 게 현실이다.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재판에 회부된 홍문종.홍준표.이신행.정한용 의원중 항소심까지 1백만원 이상 벌금이 선고된 피고인은 공교롭게도 한나라당 의원 2명뿐이다.

국민들은 왜 선거사범의 의원직 상실 여부가 여야에 따라 갈리게 되는지 의심하고 사법부를 외면하게 될까 걱정이다.

재판 결과가 '여당 무죄, 야당 유죄' 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을 오비이락 (烏飛梨落) 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혹시 선거철만 되면 부정선거는 안된다며 외쳐대던 '선거사범 엄단' 이라는 온 국민의 절규가 법관들 귀에는 한낱 구호로만 들린 것은 아닐까. 선거법이 여야에 따라 고무줄처럼 운용된다면 혹시 '벌금 1백만원 자격상실' 조항을 개정해 법관 재량을 없애자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

검찰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7월 경성비리사건을 수사하면서 국민회의 정대철 (鄭大哲) 부총재가 받은 3천만원은 정치자금으로 대가성이 없다며 입건도 하지 않은 채 수사를 종결했다.

그러나 관련자 기소후 정치인 관련설이 불거지자 국민회의측 주장에 따라 수사팀을 바꾸고 재수사를 시작했다.

수사팀 교체나 재수사는 검찰로서는 극히 굴욕적이면서도 이례적인 하나의 '사건' 이 아닌가.

더구나 차장.부장검사 등이 보임 5개월여 만에 경질된 것도 큰 충격이었다.

재수사의 성과는 鄭부총재 구속이 거의 전부다.

국민회의의 재수사 촉구후 구속됐으니 결국 국민회의가 자신들의 부총재를 구속시킨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을 야당생활로 일관하면서도 무사했던 鄭부총재가 아닌가.

입건조차 안됐던 집권여당의 부총재를 한달여 만에 방향을 바꿔 구속한 것은 아무리 봐도 '검찰 법리' 는 아닌 것 같다.

3천만원이란 액수가 4천만원으로 늘어난 것이 구속사유가 될 수는 없다.

돈의 대가성이 갑자기 드러났다는 것도 의문이다.

아울러 재수사도 곧 마무리한다니 정치인 수사 확대의 신호탄이라는 해석도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또 검찰의 수사팀 교체나 재수사의 기준이나 명분은 무엇인지 그저 모든 게 의문스럽고 어리둥절할 뿐이다.

법집행의 생명은 형평성이다.

또 투명해야 한다.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법집행은 신뢰를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가뜩이나 불신을 받고 있는 데다 법집행의 잣대마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니 큰일이다.

법원.검찰 내부의 자성 (自省)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듣고 싶은 요즈음이다.

권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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