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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는 잊었다 내 보스는 여수 사나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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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마피아 보스가 금발 미녀를 태우고 카리브해를 누볐다는 범선이 여수에 있다. 마피아는 한국의 한 조선소에 범선의 수리를 맡겼는데, 그 사이 미국연방수사국(FBI)이 마피아를 소탕하고 재산을 압류하는 바람에 범선은 주인을 잃었다. 수리비를 받지 못한 조선소의 소송을 거쳐 범선은 여수의 정채호 선장 소유가 됐다. 돛대가 네 개나 되는 이 범선은 이제 ‘코리아나호’라는 새 이름을 새긴 채 대한민국의 바다를 누빈다. 코리아나호의 구석구석 어느 곳에도 마피아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없다.

“그 어두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남녀가 함께 자는) 더블베드도 만들지 않았다.” 국내 유일의 범선인 코리아나호의 선장 정채호(61)씨의 말이다. 길이 39.6m에 너비 6.8m로 거대하면서도 날렵한, 마치 대항해 시대의 해적선을 연상케 하는 이 배에 어떤 어두운 과거가 있을까.

정 선장은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매년 페인트칠을 하며 옛날 흔적을 지우고 있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정 선장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 배를 순결하게 보호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요트계에서는 과거를 알고 있다. 미국의 마약 마피아 보스가 주인이었다.
1989년 이 늘씬한 배는 경남 진해의 대동 조선소에 닻을 내렸다. 프랑스산 샹들리에와 이탈리아 가구로 치장한 이 범선의 길이를 6m쯤 더 늘리고 마스트(돛대)를 하나 더 달아 웅장함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①최고 25m 높이의 마스트(돛대) 4개의 위용을 뽐내며 일본 쓰시마 섬으로 출항하는 코리아나호. ②마스트에서 내려본 갑판. 정박 중이거나 동력으로 움직일 때는 돛을 묶어 놓는다. ③해적선이 연상되는 코리아나호의 키. ④공구실. 항해 중 돛이 찢어지면 수리하기 위해 미싱도 필요하다. ⑤선실은 학생들 교육용으로 만들어 좁고 딱딱한 침대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다. [여수=신동연 기자]

배를 도크에 올려 놓고 해체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선주 측과 연락이 두절됐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이 배의 주인을 마약 판매 등의 혐의로 기소했고 선주가 수감됐기 때문이다. FBI는 마피아의 재산을 압류하면서 100억원 정도 되는 이 호화로운 범선도 함께 차압해 버렸다.

배는 공중에 떴다. 조선소는 FBI가 압류한 이 배를 수리할 수도,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배는 흉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채 대양의 파도를 그리워하면서 6년 동안 도크에 묶여 있었다.

다른 배를 수리해야 할 도크에 거대한 배가 묶여 있어 조선소도 골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크 사용료만 10억원 이상이 들었는데, 돈을 받을 곳은 없었다. 감옥에 갇힌 마피아 보스도 FBI도 이 배를 잊었다. 조선소는 결국 소송 끝에 이 배의 소유권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큰 배를 살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90년대 중반엔 국내에 10m짜리 요트도 별로 없던 시기다. 한 사업자가 나타나 껍데기가 벗겨진 나신의 범선을 콘도처럼 분양하겠다고 나섰는데 부도가 났다.

그러다 96년 주인을 찾았다. 전남 여수에서 상호신용금고를 하던 정채호씨가 배를 매입해 전남요트협회 소속 배로 등록했다.

정 선장은 “내 몸보다 소중한 범선을 돈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 가격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그러나 주위에 따르면 구입비만 약 15억원이 든 것으로 전해진다. 경쟁자가 없는 경매로 잡은 배라 꽤 싸게 산 것이다. “배에 레이더 등 각종 장비를 달고 미국에 남은 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꽤 많은 돈이 들었다”고 정씨는 말했다. 2000년 홍콩에서 이 배를 30억원에 사겠다는 제의를 정 선장은 거절했다고 한다.

이 배는 83년 네덜란드의 오베이예스엘세가 건조했다. 박길철 요트 국가대표 감독은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 봐도 아주 잘 빠진 배”라며 “바람만 잘 불면 13노트 정도로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필승 요트협회 전무이사는 “최소 50억원은 받을 수 있고 인테리어를 해서 가치를 높이면 훨씬 더 가격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요트와 범선의 차이는 마스트 수와 배의 길이다. 길이가 60피트(약 18.3m) 이상, 마스트 수가 2개 이상이면 범선으로 분류된다. 19세기 중반 증기선에 밀려 퇴역을 앞둔 범선들이 한데 모여 합동 장례식 비슷한 기념 행사를 하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다시 생명을 얻었다. 56년부터 커티삭 범선대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상위 1% 부자들이 요트를 탄다면 범선은 상위 0.01% 부자들이 탄다. 관리비도 적지 않고 돛을 올리고 내리는데 사람도 많이 필요해서다. 40m 정도 크기의 범선의 내부는 초호화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코리아나호의 인테리어는 소박했다. 가죽 소파와 고급 와인셀러 대신 딱딱한 비닐 의자와 김치냉장고가 자리를 지켰다. 소주병도 굴러다녔다.

선실에서의 실망은 더 컸다. 비단 커튼이 드리워진 킹사이즈 침대와 대리석 월풀 욕조가 들어선 호화 요트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도미토리 형의 좁은 침대가 빼곡히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정 선장이 교육용으로 배를 개조했기 때문이다. “마피아의 ‘마’자도 느끼지 못하게 배를 바꿨다”는 것이다.

그래도 짜릿한 추억은 남아 있다. 당시 정 선장과 함께 배를 구매했던 박길철 감독은 “창고 깊숙한 곳에서 비에 젖은 앨범이 발견됐다. 뚱뚱하고 수염을 기른 라틴계의 중년 남성이 시가를 물고 젊은 미녀와 낚시로 잡은 거대한 청새치를 보면서 웃고 있는 사진 등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남자는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고 여자는 대단한 금발 미인이었다”고도 했다. 그는 “장소는 플로리다나 카리브해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대동 조선소는 지금은 STX조선에 인수됐다. 당시 마피아의 배 때문에 고생하던 관계자들은 다 떠나고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FBI가 은밀하게 수사를 해서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한다. 범선의 과거 이름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요트계에서는 조선소가 마피아의 범선을 볼모로 잡아 낭패를 보고 결국 다른 회사로 넘겨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된다.

마피아가 이 배를 잃은 지 20년이 지났다.
지난 15일 오전. 여수의 하늘은 시루떡처럼 어둡고 두터운 구름으로 뒤덮였다. 이날은 ‘코리아나’로 옷을 갈아 입은 마피아의 배가 해양레포츠연맹 간부들을 태우고 일본 쓰시마섬으로 출항하기로 한 날이다. 오전에 비가 내렸고 여수공항의 비행기는 결항됐다. 간간이 천둥과 번개도 쳤다.

그러나 여수 소호 요트 경기장에 정박해 있는 코리아나호의 정 선장은 “예정대로 떠난다”고 말했다. 이 정도 비바람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오후 들어 비는 그쳤다. 박 감독은 “날이 안 좋으면 좀 고되긴 하겠지만 출항은 가능하다”며 “코리아나호는 미지의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배”라고 말했다.

내부 인테리어는 소박하지만 코리아나호는 웅장하다. 마스트 높이는 25m이고 세일(돛) 면적은 758㎡로 약 230평이다.

정 선장이 인수한 후에도 한참 동안 코리아나호는 외로웠다. 간간이 일본의 범선 축제 정도에 나가는 수준이었다. “1년에 관리비가 1억5000만원 정도 드는데 연 두세 차례 배를 띄웠으니 한 번 탈 때마다 5000만원이 드는 꼴이었다”고 정 선장은 말했다. 박길철 감독 등을 제외하곤 국내엔 이 범선을 운항할 사람이 없어 러시아 선장과 항해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요트 붐이 일면서 배는 활력을 찾았다. 각종 해양축제나 부쩍 늘어난 크루저 요트 대회에서 얼굴마담으로 쓰기 위해 코리아나호를 초청하기 때문이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2000만원 정도 받고 교육용 등으로 이용되면서 관리비 정도는 충당된다고 한다.

오후 코리아나호는 거대한 돛을 펴고 쓰시마로 떠났다.
요트 매니어인 허영만씨도 여수 출신이다. 그는 “여자와 별장과 요트는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그립다”고 했다.

범선을 빼앗긴 마피아 보스는 아직 살아 있을까. 미녀와 함께 거대한 범선을 타고 카리브해의 달빛 속으로 항해하던 그 화려한 시절이 그리울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가 죽었다 해도 그 시절은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여수=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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