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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2> 지셴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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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25일 베이징 베이하이(北海)공원에서 열린 싼롄(三聯) 사장단 오찬에 참석한 지셴린(오른쪽에서 둘째). 김명호 제공

1920∼30년대, 대학 졸업은 곧 실업이었다. 무슨 수를 쓰건 밥그릇을 꿰차야 했다. 유학생들은 사정이 달랐다. 귀국과 동시에 몸값이 100배로 치솟았다. 전국에 유학병 환자들이 많았다. 지셴린(季羨林)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도 당연히 유학열에 시달렸다. 증세가 심했다”고 훗날 회상했다.

부유한 상인이나 고관집 자녀들은 자비로 유학길에 올랐다. 지셴린은 산둥성의 빈농 출신이었다. 오리 한 마리도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관비는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명문세가 출신들이 지원을 안 하다 보니 공정하기는 했지만 응시자가 너무 많았다.

지셴린은 34년 칭화대학 서양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지난(濟南)에 있는 모교의 국어교사로 초빙을 받았다. 학생시절 발표했던 ‘황혼’ ‘해당화’ 등 산문 덕분이었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괴테가 머리에 가득 차 있었던 23세의 청년은 굴원(屈原)·두보(杜甫)·한유(韓愈)·소동파(蘇東坡)와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국학과의 첫 대면이었다.

산둥의 중·고교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밥그릇 싸움이 유난히 치열했다. 교장이 바뀌면 교사부터 경리직원까지 학교를 떠났다. 최대 파벌은 베이징대와 베이징사범대학 출신들이었다. 모교의 교장은 베이징대파의 보스였다.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포섭해 세력을 확장하려던 중 칭화대 출신인 지셴린의 산문을 우연히 읽었다.

교장은 지셴린을 데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마작판에 어울리지 않았고 작전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조직적으로 사대 출신들을 모함하는 재능도 전혀 없었다. 칭화대학 출신들을 규합해 자신을 지지해 주기 바랐지만 그것도 착각이었다.

지셴린은 문예지를 만들어 주옥같은 산문들을 발표하고 학생들에게도 게재할 기회를 줬다. 앉기만 하면 학생들의 잠자리와 먹는 것 걱정이었다. 교장은 자신이 한심했지만 교사들에게는 “대학자의 자질이 있다”며 지셴린의 무능을 감쌌다. 지셴린은 친구들의 출국소식을 들을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유럽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노닐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신선임이 분명했다.

칭화대학과 독일의 학술교환처(DAAD) 사이에 연구원을 교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매달 120마르크를 지급하고 여비는 자비부담이었다. 한 달에 800마르크씩 받는 관비유학생과는 천양지차였지만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지셴린은 대학시절 성적표 하나로 관문을 통과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교장이었다. 연일 연회를 베풀었다. “귀국하면 꼭 함께 일하자. 유학기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거의 파산상태였던 가족들은 “굶기는 쉬워도 죽는 것은 어렵다”며 지셴린을 안심시켰다.

35년 10월 31일 지셴린은 괴팅겐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일기에 “독일은 나의 천당이며 이상향이었다. 도저히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새로운 꿈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만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영광의 상징인 고대문자를 연구하겠다”고 적었다. 먼저 와있던 장융(章用)이라는 중국학생이 범문(梵文)을 권했다. 장은 전 교육총장 장스자오(章士00)의 아들이었다. 12월 16일 일기에 “중국 문화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중국과 인도의 문화관계를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다짐했다.

괴팅겐대학은 19세기 초부터 동방 고(古)문자 연구의 총본산이었다. 도서관에는 범문과 트루판·바빌론·아랍·페르시아·터키의 연구서와 고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셴린은 꿈을 찾았다. 이후 70여 년간 한 가지 꿈만을 꾸었다. 하루가 48시간이 아닌 것이 한(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2년 예정이던 독일 유학은 10년이 걸렸다. 열정 하나로 버틴 청년 시절이었다. 지셴린은 여든이 넘어서도 색 바랜 중산복을 입고 도서관 열람실을 찾았다. 집안도 책이 많은 것 외에는 일반인의 집 실내와 다를 것이 없었다. 지난 11일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서거 소식을 전하며 ‘국학대사’나 ‘국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지셴린은 언어학·민족학·사학을 넘나든 명번역가이며 명산문가였다. 800여만 자의 저술과 번역을 남겼다.

말년에 그의 병상을 국가지도자들이 연이어 방문했다. “국가를 찬양하는 것만 애국이 아니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애국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노학자에 대한 예우가 국내외에 보도되는 바람에 중국의 품격을 높이는 데도 큰 몫을 했다.

국학대사나 국보급 인물은 예전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그러나 당대의 학자 중 끝까지 소박함을 잃지 않고, 남보다 특출 난 존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지셴린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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