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나도 소싯적에는 태호와 똑같은 경험이 있었어. 서울 공사판에서, 호랑이 구경 못한 해변 강아지처럼 무서운 게 뭔지 모르고 살 적 얘긴데…, 우리가 상대했었던 건축주나 공사감독들이 자주 드나들던 소문난 설렁탕집에 외양이 무던하게 생긴 주인딸이 있었어.

스물다섯이었던가 여섯이었던가, 소싯적 일이 돼서 삼삼하구만. 하긴 지금 와서 나이를 따진다는 게, 숨 끊어진 자식새끼 자지 까보기지. 어쨌든 그 아가씨가 언제부턴가 줄곧 내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깨달아도 아주 확실하게 깨달았지. 식당 입구 카운터에 앉아서 전표도 끊고 경리를 보고 있었거든. 그 아가씨가 호감을 가진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던 날, 나는 술 마신 놈처럼 알딸딸하더군.

서울 시내에서 자기네가 경영하고 있는 설렁탕집만 해도 세 개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집의 멀쩡한 딸이 공사판 청부깡패인 내게 정분을 두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런데 까닭이야 어찌되었든 나는 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지. 그런데 세상 물리란 게 장군 하면 멍군 해야 궁합이 맞듯이 내가 가진 것중에 도대체 어떤 점이 그 아가씨 마음에 들어서 뜨거운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인지 그 내막을 알아야 나도 현명하게 대처할 것이 아닌가.

난 백수건달이었어. 가진 것이라곤 쥐뿔도 없었어. 재산이고 학력이고 가문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털어내봐야 자랑할 것이라곤 불알 밑에 낀 때와 작업복 털면 떨어질 먼지밖에 더 있었겠나. 그렇다면 이 아가씨가 도대체 나한테서 발견한 게 뭘까. 그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미치겠더구만. 밤에 잠도 안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중엔 그 식당 드나들기조차 거북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삐끗하다가 그 아가씨한테 내 못난 치부가 드러나면 어떻게 하나 그게 두려웠던 거야. 너무 답답해서 같은 껄렁패들에게 하소연도 해봤지만, 으슥한 곳에 끌고가서 벗기고 요정을 내버리라는 얘기밖엔 들은 게 없었어. 그러나 나는 끈질기게 그걸 찾았었지. 내가 가진 것중에 뭐가 마음에 들어서 그 아가씨가 내게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어. 왜냐하면 나도 그 아가씨가 미치도록 좋아지기 시작했거든.

그땐 수염도 기르지 않았을 시절이었으니까 해변마담들처럼 구레나룻 수염이 맘에 들지도 않았을 테고, 허우대가 준수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을 테고, 공사장 청부깡패가 의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다녔던 것도 아닐 테고, 코가 커서 그것도 크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눈이 커서 시원한 인상을 가진 위인도 아닌데, 그 아가씨가 왜 그럴까. 미치겠더구만.

너무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니깐 나중엔 대가리까지 띵해서 세상사가 모두 희미하게 보이고, 모든 것들이 내게는 시큰둥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물론 식당 출입도 삼갔었지. 의문이 풀리면 당당하게 출입을 시작하리란 생각 때문이었어. 그런데 그런 의문이 풀린 게 언젠지 알어? 눅게 잡아도 5개월은 지난 뒤의 일이었어.

그때 가서야 비로소 그 아가씨가 내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던 까닭을 알아냈지. " "그게 언젠데요? " "그 아가씨가 결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난 뒤였지. " "저런 낭패가 있나? 아슬아슬하지만 결혼식을 하기 전이니까, 절망적인 살황까지는 가지 않았으니 희망이 없지는 않았겠습니더. " "봉환이형. 침착하세요. 살황이 아니고 상황입니다. "

"그 아가씨가 나를 좋아했던 까닭을 언제 알아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떤 동기 때문에 알아낼 수 있었느냐가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지. " "그 여자가 결혼 한다카이 형님이 후끈 달아서 다짜고짜 만나자고 협박정도 했겠지요. " "협박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만나자고 한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나를 좋아했던 자초지종도 내 자신의 노력으로 알아낸 게 아니고 그 아가씨가 가르쳐준 것이었어.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