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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국가정체성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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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 문구에서 국가의 정체성이 출발한다"고 배웠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국가의 법통과 국가가 추구하는 이념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헌법 전문을 들먹이며 말문을 여는 까닭은 최근 느닷없이 불거져 나온 '국가 정체성 논란' 때문이다.

지난주부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이 문제를 내세우며 "여권과 전면전도 불사하겠다"고 격앙된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박세일 의원 같은 이는 박 대표의 '전면전' 발언에 "이는 의문사진상위.서해 북방한계선(NLL) 사건 등 최근 국가 기강을 흔들고 헌법의 기본질서와 가치를 훼손시킨 사건을 지적한 것"이라며 옹호하고 나섰다.

이에 맞서 여권 수뇌부는 "정체성 시비는 박 대표와 야권이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법' 제정 등 과거사 규명으로 입게 될 정치적 타격을 우려해 국민 여론 호도용으로 만들어낸 기획성 논란"이라고 직공을 퍼붓고 있다.

헌법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배운 국민은 혼란스럽다. 과연 야권이 내세우는 사안들이 국가정체성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외환위기 당시보다 더 어렵다는 경제위기 국면에서 그런 논란이 적절한 것인지….

야당 의원들이 헌법을 모른다면 몰라도 국가정체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노무현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지 않았고 4.19 민주이념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런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몰라도 현 정권의 정체성 문제 거론은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체성 시비를 고집한다면 국력소모는 물론이고 쓸데없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

NLL사건 등이 헌법의 기본질서를 흔들었다면 그것은 법과 대화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상생의 대화정치를 펼치겠다는 총선 약속을 몇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렇다고 청와대와 여권을 두둔하자는 게 아니다. 야당이 정체성의 훼손으로 문제삼고 있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월권 행위에 대한 청와대와 여권의 대응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NLL을 두고 발생한 남측의 함포사격에 대한 청와대 입장도 국민의 납득을 사기에는 부족했다.

자칫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함포 사격까지 해놓고 상부에 사후보고마저 하지 않은 것은 국가 안보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런데도 사기진작이니 하는 말로 덮어두었으니 야권에 헌법 위배를 거론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그렇지만 백번 양보해도 현재 여야의 국가 정체성 논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자칫 국민의 구체적 일상과는 거리가 먼 지루한 소모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리당략에 얽매인 정치인들의 불순한 의도와 이전투구로는 결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정체성인 민주주의도 지킬 수 없다.

지금은 여야가 힘을 합해 급변하는 세계 경제 변화에서 총력을 기울여도 경제회복이 될까 말까한 위기 국면이다.

국민을 불행에 빠뜨리는 소모적이고 편가르기식의 전면전이 아니라 경제회복을 위한 상생의 전면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임봉수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