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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 전성기 연 김일, 흑백TV 시대의 ‘국민 영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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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965년 7월 프로레슬러 김일이 8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왔다. 그는 TV시대의 첫 영웅이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는 이장집 마당에 앉아, 혹은 담배연기 매캐한 만화방의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사람들은 비틀거리던 그가 박치기 한 방으로 후련하게 끝내주는 흑백 화면을 바라보며 환호했다. 먹던 고구마가 튀어나오고 꽁초 담뱃불이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호랑이와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김일은 손을 번쩍 들며 맹호처럼 포효했다.

김일(사진左)을 생각하면 숙적이던 안토니오 이노키右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도산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 간 국가경쟁심의 대리자가 되어 부지런히 싸웠다. 이노키는 세 가지 전설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주걱턱 영감’이다. 그는 자신의 긴 턱이 급소인 목의 안쪽을 보호하는 무기라고 자랑했다. 이노키가 잠든 사이 아내가 턱 사이즈를 재보니 중지가 다 들어갔다는 얘기도 전한다. 둘째는 ‘당뇨병 파이터’. 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병을 완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셋째는 ‘투혼 빈타’이다. 빈타는 일본어로 ‘따귀 때리기’로 ‘하리테’라고도 한다. 의원 시절(89년 스포츠평화당을 창당해 참의원이 됐다)에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을 한 뒤 맷집을 과시하기 위해 한 학생에게 자신의 배를 때려보라고 말했다. 주먹이 날아온 뒤 이노키는 실신할 뻔했다. 학생이 태극권 유단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반사적으로 학생의 따귀를 날렸다. 이 장면이 TV에 중계되면서 화제를 부른다. TV를 본 재수생 몇이 같은 방식의 놀이(배를 치고 뺨을 맞는 일)를 이노키에게 요청했는데, 이후 그 학생들이 모두 도쿄대에 합격한다. 이야기가 퍼지자 그의 집 앞엔 따귀를 맞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김일이 이노키와 맞붙은 건 38차례였고 김일이 9승1패28무승부로 훨씬 우세했다. 딱 한 번 진 건 74년 10월 10일이었다. 그는 이노키의 특기인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려 경기 13분13초 만에 항복했다. 하지만 이노키는 김일의 명성을 열심히 띄워준 들러리였다. 둘은 경기가 끝나면 함께 빨래를 하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노키는 밤이 되면 또 한번 게임을 치러야 했는데, 김일의 코 고는 소리였다. 그는 이불을 세 개나 덮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2006년 김일 장례식 때엔 적이자 동지였던 그가 슬픔에 젖어 한국을 찾기도 했다. 프로레슬링은 저물었지만 박치기와 주걱턱은 추억의 링에 선 영원한 파이터다.

이상국(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