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아래아한글과 애국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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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래아 한글' 살리기 운동을 보고 뉴욕의 록펠러센터가 일본기업에 넘어갈 때의 일이 생각났다.

록펠러센터는 맨해튼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센터를 구성하는 19개의 건물들은 아르데코 예술의 집합체이며 NBC방송.타임 워너.모건 스탠리 같은 세계적인 회사들이 세들어 있는 빌딩군이다.

그것은 미국의 프라이드요, 뉴욕의 자랑이다.

89년 록펠러센터가 8억5천만달러에 일본의 미쓰비시그룹에 팔리자 미국인들의 실망은 컸다.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본사람에 비해 열등한 '경제 동물' 이 아닌가 하고 탄식했다.

그때 뉴욕 타임스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나섰다.

록펠러센터의 소유주 대표인 체이스 맨해튼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록펠러센터는 좋은 값에 팔렸다고 만족해 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재 (理財) 의 귀재인 록펠러가 잘된 흥정이라고 했으면 그걸로 잘된 일이고, 록펠러 집안에서 세운 석유회사들인 엑슨과 모빌이 본부를 뉴욕 밖으로 옮기면서도 록펠러센터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을 봐도 일본사람이 록펠러센터를 샀다 해서 섭섭할 것은 없다고 논평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못돼 경제의 거품이 터진 일본은 록펠러센터를 미국에 되팔아야 했다.

한글이 한국인에게 갖는 의미를 록펠러센터가 미국인들에게 갖는 중요성에 비유하는 것은 한글에 대한 모욕이다.

글이 마이크로 소프트에 팔리는 것이 한글의 권위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국민운동을 해서라도 막아야 할 일이다.

빌 게이츠는 아래아 한글 지키기 운동에 밀려 2천만달러를 투자해 한글과컴퓨터 (한컴) 를 인수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아래아 한글 개발의 중단을 성급하게 선언해 실패를 자초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자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빌 게이츠는 한컴을 인수해 한글의 세계화를 통한 사업확대의 청사진을 제시했어야 했다.

일단은 아래아 한글 소프트웨어를 쓰는 소비자들과 한컴을 인수한 사업가들의 승리다.

그것이 겨레의 자존심을 지켜냈다고 하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글 프로그램이 없어질 경우 감수해야 하는 혼란과 경제적인 부담이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래아 한글 지키기 운동에는 명암 (明暗) 이 있다.

외국 투자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사업상의 흥정이 한국인들의 애국심을 앞세운 '운동' 으로 좌절된 것이다.

한컴을 국민기업으로 키우겠다는 포부 또한 조건반사적으로 기아자동차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기아의 제3자 인수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합리적인 계획도 없이 기아를 국민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저항하면서 시간을 끌어 한국경제에 IMF족쇄를 채우는 데 기여했다.

헤럴드 트리뷴지는 이번 일은 외국투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의혹을 반영하는 것으로 외국투자가들에게 좋은 신호가 아니라고 말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이 사건은 외국투자를 유치하려는 한국의 노력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래아 한글 지키기 운동에서는 애국심과 기업의 이해가 뒤섞이고, 한글 사랑과 글이라는 상품에 대한 선호가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외국 언론의 비판 따위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한보와 기아에서 한컴에 이르는 사태가 대외적으로 주는 부정적인 인상이 문제다.

외국자본이 한국에 진출하려면 손에 잡힐듯 말듯한 한국인들의 국민정서라는 경제외적인 요소가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확산될까 걱정인 것이다.

지금부터 많은 주요 기업들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간다.

무엇이 우리 것이고, 무엇이 한국회사인가를 다시 생각해 '우리 것' 의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주요 기업이 외국자본에 팔릴 때마다 너무 많은 아드레날린이 쏟아질 것이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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