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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을 자리는 어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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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대학 시절 은사께서 돌아가셨다. 이미 아버지·어머니·장인·장모를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이기에 죽음에 대해 그다지 거리감이 없는 처지이지만 은사의 갑작스러운 부음 소식은 며칠 동안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직 세상을 뜨시기엔 아까운 연세였기에 갑작스러운 부음 소식이 더욱 안타깝고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외람되지만 이젠 ‘내 차례’ ‘우리 차례’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은사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고 황망한 마음으로 조문을 다녀오면서 온갖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저런 생각이 닿은 마지막 종착역에서 마주한 물음은 이것이었다. “내 죽을 자리는 어디인가?” 요즘은 대부분 병원 침대 위에서 세상을 뜨기 일쑤다. 또 어떤 경우엔 갑자기 욕실에서 목욕하던 중에 세상을 뜨기도 하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영영 저세상 사람이 되기도 한다. 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비명횡사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횡액을 맞기도 한다. 어디 그뿐이랴. 혹시 내가 탄 이 비행기가 추락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두 번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말이지 우리의 일상에는 죽을 일들이 쌓였고 도처에 ‘내 죽을 자리’가 널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내 죽을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단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소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내 죽을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은 내가 과연 무엇에 몸 바쳐 매진하다 생을 마감할 것이냐는 적나라한 실존의 질문이다. 죽는 날까지 뭔가에 죽도록 매진하다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은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다 무대 위에서 죽는다면,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다 삶을 마감한다면, 교수가 강단에서 강의하다 쓰러진다면 그 이상 아름다운 일이 또 있겠는가. 끝까지 자기의 길을 걷는 것, 죽도록 자기의 일에 매진하는 것, 그리고 거기가 자기의 죽을 자리가 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1950년 9월 16일 백혈병을 앓고 있었던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브장송에서의 피아노 독주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말렸지만 리파티는 청중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독주회를 강행했다. 걷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연주회장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주사 기운 탓인지 그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예고된 프로그램에 따라 피아노 연주를 이어 갔다. 바흐의 ‘파르티타 1번’,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8번’, 슈베르트의 ‘즉흥곡’ 등을 연이어 연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쇼팽의 ‘왈츠’ 14곡 전곡 중 마지막으로 연주하려던 2번을 마치지 못한 채 리파티의 피아노 독주회는 막을 내렸다. 그가 쓰러져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채 3개월이 안 돼 리파티는 저세상 사람이 됐다. 리파티는 자신의 죽을 자리였던 바로 그 연주회장에서 사실상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리파티의 브장송 독주회 실황은 EMI의 실황 녹음으로 출반돼 아직도 듣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저마다의 순번도 있고 순서도 있다지만 세상을 떠나가는 것은 순번도 없고 순서랄 것도 없어 보인다. 언제 그것이 내 앞에 닥칠지 알 수 없다. 오늘낼 오늘낼하던 사람이 십수 년을 더 연명하는 경우도 적잖고 늘 젊고 팔팔할 것 같던 사람이 허무하다 싶을 만큼 먼저 가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처럼 언제 우리에게 삶의 마지막 영수증이 날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그 마지막 영수증이 날아오기 전에 내 죽을 자리가 어디인지 제대로 알고 삶의 불꽃을 단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피워 내야 하지 않겠나.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