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 기자의 JOB 카페] 비정규직 해법은 사회안전망 구축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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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근로자 한 명이 두세 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오전에는 교사로, 오후에는 자동차 정비공을 하는 식이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분명 비정규직 근로자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를 비정규직이 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난해 스웨덴에서 만난 한 한국인 관광가이드(44·여)는 “오전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 하교하는 딸을 집에 데려다 준 뒤 오후 3시쯤 관광가이드로 나선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교사다. 오전과 오후, 직장만 다를 뿐 그가 가진 자산(역사 지식)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녀와 가정을 돌보면서 내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덧붙였다.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택했다는 얘기다. 네덜란드의 경우 70%가량이 이런 자발적 비정규직 근로자다. 비정규직들이 불만을 쏟아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마다 자신만의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등 숙련도도 높다.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하다.

이들이 비정규직이면서도 이렇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 하루 근무시간이 8시간인데 비정규직으로 4시간을 근무한다고 치자. 대부분 비정규직들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받는다. 복지 수준도 비슷하다. 비정규직 스스로도 직업훈련을 받는 등 숙련도를 높이려 노력한다. 그래서 회사의 생산성에도 큰 지장이 없다.

또 하나는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덴마크는 실직자에게 퇴직 직전 임금의 90%를 실업급여로 준다. 실직했다고 생활 수준이 떨어져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정부가 시행하는 직업훈련을 성실하게 받아야 한다. 정부는 실직자에게 회사를 알선한다. 실직자는 정부가 주선한 일자리를 거부할 수 있지만, 딱 세 번까지다. 세 번이나 정부가 알선하는 일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부는 해당자에게 실업급여를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비정규직보호법에도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처우를 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위원회에 신청해 구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현실에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비정규직 중 고용보험에 가입된 경우가 절반이 안 될 정도로 사회안전망도 취약하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근로기간 제한이라기보다는 ‘한 번 일자리를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회적 여건 내지 분위기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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