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의 주먹’이 남긴 트라우마, ‘팝 황제’의 행복을 앗아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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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10면

마이클 잭슨이 2005년 5월 아동 성추행 혐의로 캘리포니아 샌타마리아 법정에 출두했을 때 아버지 조 잭슨(사진 뒤쪽)이 동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LA지방법원에는 1일(현지시간) 2002년 ‘팝 황제’ 마이클 잭슨이 작성한 유언장이 제출됐다. 재산을 어머니 캐서린(40%)과 세 자녀(40%), 자선 기관(20%)에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조 잭슨(79)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마이클 잭슨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

마이클은 왜 아버지를 경원했을까. 지난달 28일 열린 ‘블랙 엔터테인먼트 텔레비전(BET)’ 시상식장. 마이클이 세상을 뜨자 추모 행사로 바뀌었다. 이날 행사에는 조 잭슨도 참석했다. 아들이 사망한 지 사흘 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마이클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타였다. 바로 지금 그는 어느 때보다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클을 ‘수퍼스타’라고 불렀지만 ‘내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어진 CNN과의 인터뷰는 전 세계 팬들을 경악시켰다. 마이클의 죽음 이후 그의 어머니와 가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마셜과 나는 ‘랜치 레코드’라는 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옆에 서 있던 비즈니스 파트너 마셜 톰슨은 “블루레이(차세대 동영상 기술)가 적용됩니다”고 덧붙였다.

1960년대 중반 마이클 잭슨의 가족. 마이클(앞줄 맨 왼쪽)이 하품하고 있다. 9명의 자녀 중 맏딸 레비 잭슨만 보이지 않는다. MJSite.com

마이클의 죽음에 슬퍼하던 전 세계 팬들은 들끓었다. 흑인 라디오 쇼 진행자 워런 발렌틴은 “조 잭슨의 무감각이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은 아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은 조 잭슨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들이 죽자, 아들의 관을 놓고 도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 가디언지 인터넷판의 한 블로거는 “조 잭슨은 자신의 손자·손녀들로 ‘마이클 잭슨 주니어’라는 밴드를 만들지 모른다. (마이클이 남긴) 세 고아는 새로 시작한 레코드 회사와 30년짜리 계약서를 작성해야 할지 모른다”고 조롱했다.

마이클, 성인된 뒤 아버지 간여 배제
유언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뺀 아들, 아들 추모식장에서 자신의 새 레코드를 홍보한 아버지…. 마이클의 죽음은 불편했던 부자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마이클은 진작부터 아버지를 원망해왔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선 “8살부터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아버지만 보면 무서워서 토할 것 같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레코드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는 딸 패리스(왼쪽)와 아들 프린스. Splash News

‘왜 주변에 아이들을 두느냐’는 질문에는 “아이들을 통해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청소년기에 대해선 “나는 여드름이 아주 심했고, 그 때문에 무척 소심해졌다. 그는(아버지는) 내가 못생겼다고 말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곤 “미안해요, 조셉”이라고 덧붙였다.

마이클과 형제들은 아버지를 결코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조셉’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철의 주먹(iron fist)’은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권투선수, 록밴드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레코드 취입에 실패한 후 철강회사 유에스스틸의 크레인 운전기사로 일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아이들로 밴드를 구성하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악기를 샀다. 아이들은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 마을 이곳 저곳에서 공연하고 돈을 벌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잭슨5’가 우리 학교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을 보는 데 25센트씩 냈다. ‘잭슨5’는 모두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 그리고 허리에 빨간 띠를 둘렀다.” 당시 이웃에 살던 레올라 마콘의 회상이다.

“우리가 연습하는 동안 아버지는 채찍을 들고 의자에 앉아 우리를 지켜봤다. ‘제대로 못하면 이 채찍이 네놈들을 찢어놓을 거다’라고 말했다.” 마이클의 형 말런이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마이클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어린 마이클에게 혹독한 훈련을 강요했다.

“어느 날 밤 조셉은 무시무시한 마스크를 쓰고 마이클이 자는 방 창문으로 넘어 들어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잘 때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이클은 악몽에 시달렸다.”

마이클의 친구이며 전기 작가인 랜디 타라보렐리는 “마이클은 아버지에 대해 상충되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성인이 되자 그는 비즈니스에 아버지가 간여하는 걸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고 전했다.

아들이 곤경 빠질 때마다 방패 역할
마이클을 세계적인 팝 스타로 만든 것은 아버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아들의 재능을 발견해 집중 훈련을 시켰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마이클은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인생을 고민할 청소년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8살 때 이미 스타였던 그의 주변에는 돈을 노리고 그를 이용하려는 할리우드 사람이 넘쳐났다.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고, 아버지는 기피 대상이었다. 마이클은 77년(당시 19세)에 한 인터뷰에서 “나는 쥐를 사랑해요. 쥐들과 놀 때면 친구와 얘기하는 것 같아요”라고 토로했다.

성인이 된 마이클은 ‘왁코 잭코(괴짜 잭슨)’라는 별명을 얻었다. 얼굴은 희게 탈색되고, 거듭된 성형수술로 코는 주저앉았다. 아동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하는가 하면 두 번의 결혼도 실패했다. 아버지가 남긴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착취하고 파괴한 악당이었을까. 조 잭슨의 친구인 루트 프렘스리루트는 1일 ABC뉴스에 출연해 조 잭슨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는 조를 “강철 같은 사람이다.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한다”고 평가했다. 마이클이 지난달 25일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경호원의 첫 번째 조치는 조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침착하게 ‘911에 빨리 전화하라’고 지시했다. 2003년 마이클이 아동 성추행으로 소송에 휘말렸을 때 방패로 나선 것도 아버지였다.

소송 기간에 조는 사건이 벌어진 샌타바버라 지역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아들을 변호했다. 지역 유력 인사들과 만찬을 하면서 결백을 주장했다. 지방법원에서 진행되는 소송에선 지역 여론의 향방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는 마이클과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라면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라는 게 친구 프렘스리루트의 평가다.

60년대 초반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 밴드를 시작한 조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마이클이 살던 인디애나 게리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슬럼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9명의 자식을 수퍼스타로 키워냈다.

성공과 성숙한 인격은 별개
65년 작성된 ‘흑인 가정: 국정 활동을 위한 사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흑인 아버지들은 백인 아버지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했다. 그렇지 못한 흑인 가정은 최하층 계층으로 추락해야 했고, 많은 흑인 아버지는 가정을 버렸다. 마이클의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경제적 성공과 자식들의 출세를 이뤄냈다. 하지만 아들이 성숙한 인격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는 『아버지란 무엇인가』에서 “아버지는 아이의 정신적 탄생과 성장을 이끌어 주고 미래를 축복해주는 존재”라고 서술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은 더 좋은 직업을 갖도록 독려하거나 값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알려주고 자식들이 개성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치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한 것처럼, 아들 앞에서도 직접적인 칭찬과 축복의 말을 해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이들은 축복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부성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는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아빠는 널 사랑한다.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즈를 ‘미국에서 성장한 최초의 흑인 골프선수’로 생각한 얼 우즈는 두 살 때부터 골프채를 잡게 했고, 6살 때 마인드컨트롤 테이프를 듣게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음을 얻으려면 먼저 존경받는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타이거 우즈』라는 책에서 “부자 관계는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집과 같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단 한 번 만나 농구공을 선물한 뒤 떠났다. 오바마가 농구에 빠진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미국 유학 뒤 고국(케냐)으로 돌아가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매진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은 “마이클 잭슨처럼 성공을 위해 매진하면서 어린 시절을 빼앗긴 사람들의 출세는 빠를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된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숨 쉴 틈 없이 학원과 책상으로 내몰고 있는 한국의 부모들이야말로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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