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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더위엔 보신탕ㆍ삼계탕보다 민어찜?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20세기 초 한성(서울의 옛이름)의 초복날로 시계바늘을 돌려보자. 서민의 가정에선 보양식으로 보신탕ㆍ추어탕을 준비한다. 반가(班家)에선 육개장ㆍ삼계탕을 끓인다. 이보다 더 행세깨나 하는 집안에선 민어 잔치가 벌어진다. 왜 하필 당시로선 흔하디 흔한 민어냐고? 잡히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리는 성질 급한 민어를 바닷가가 아닌 서울에서, 그것도 한여름에 먹자니 비쌀 수밖에.

옛 개성 양반이 ‘복달임(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치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으로 임자수탕을 즐겼다면 서울 양반은 민어 요리에 탐닉했다. 큼직한 민어 한 마리를 올려 놓고 회를 뜨거나 찜ㆍ탕을 끓여 푸짐하게 먹었다. 지금도 “복더위엔 민어찜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삼품”이란 말이 전해진다. 더위에 지친 기력을 회복시키는 데 도미나 보신탕보다 오히려 낫다는 뜻이다.

민어는 초여름이 제철이다. 다 자라면 길이 1m 남짓, 무게 15~20㎏에 달할 만큼 기골이 장대한 어종이다. 비늘이 두껍고 커서 요리하기도 편하다. 비린내가 없고 맛이 담백하기로도 유명하다. 흰살 생선 중에서 맛 좋기로 소문난 도미ㆍ참조기도 민어 앞에선 꼬리를 내릴 정도다. 그래서인지 제사상ㆍ혼례상 등 잔칫상엔 으레 민어가 한가운데를 차지한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민어를 “입과 비늘이 크며 맛이 달다. 익히거나 회로 먹는다”고 기술했다. 또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살이 후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살은 생선 중에서 가장 소화ㆍ흡수가 잘돼 어린이의 발육을 돕고 노인이나 큰 병을 치른 환자의 건강 회복에 유익한 생선”으로 평가했다.

민어는 비늘 외엔 버릴 게 없다. 껍질ㆍ알도 밥과 함께 먹으면 찬사가 절로 나온다. “날껍질에 밥 싸 먹다가 논 팔았다”는 식담까지 있다. 껍질을 말려서 튀겨 먹기도 한다. 심지어는 부레(공기주머니)도 다양하게 이용된다. 관절 건강과 피부 탄력에 유익한 젤라틴ㆍ콘드로이틴 성분이 들어 있고 접착력이 강해서다. 옛 사람들은 민어 부레로 젓갈을 담그거나 삶아서 기름 소금에 찍어 먹었다. ‘가보’라는 음식의 재료로도 사용했다. 민어 부레 속에 소(쇠고기ㆍ오이ㆍ두부 등)를 넣고 삶은 뒤 둥글게 썬 일종의 생선 순대가 ‘가보’다. 우리 선조는 또 민어 부레를 끓여서 만든 민어풀을 강력 접착제로 썼다. 민어풀로 붙이면 ‘천년은 간다’고 여겼으며 실제로 고가구ㆍ합죽선 등의 제작에 사용했다.

민어는 회ㆍ구이ㆍ찜ㆍ탕ㆍ전ㆍ산적 등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생선이다. 토막 낸 민어를 갖은 양념(애호박ㆍ파ㆍ마늘ㆍ생강 등)과 함께 냄비에 넣고 고추장으로 간을 해 얼큰하게 끓인 것이 민어 매운탕이다. 민어 산적은 민어살과 쇠고기를 양념해 번갈아 가며 꼬챙이에 꿰어 구운 것이다.

영양적으론 여느 흰살 생선과 마찬가지로 고단백(생것 100g당 19.7g)ㆍ저지방(4.7g)ㆍ저열량(127㎉) 식품이다. 혈압을 조절하는 칼륨(290㎎)과 뼈ㆍ치아 건강을 돕는 칼슘(52㎎) 함량이 높은 것이 장점이다. 한방에선 ‘개위(開胃, 식욕 증진)와 하방광수(배뇨)를 돕는 생선’으로 친다.

민어는 서해안에서 잘 잡히던 생선이다. 민어(民魚), 즉 ‘국민 생선’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신안 임자도, 무안 도리포 등 일부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할 만큼 어획량이 현저히 줄었다. 조기처럼 물속에서 개구리 울음을 내는 민어를 잡기 위해 어부들이 대통을 들고 나가던 모습은 이제 빛 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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