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좌파의 역사 읽기와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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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시즘의 미래는 있는가? 이런 제목의 책을 오늘 대한다면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왕급진’이 아니라면 아마도 “미래 같은 소리 하네”라며 쓰게 웃을지 모르겠다. 혹시 이 책이 번역된 17년 전이었다면 어떠했을까? ‘꼴보수’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웬 미래? 현재도 있는데”하고 되받았을 것이다. 혁명이 코앞에 닥쳤다고 믿던 때였으니까. 당시의 화끈한 전망은 빗나갔으나 오늘의 냉소적 관찰은 17년 뒤에 어떻게 될까?

이런 상념 속에 같은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선언』(책갈피, 2003년, 239쪽, 9500원)을 펴들었다. 자본주의 아닌 것이 없는 세상인지라 ‘반자본주의’란 말이 사뭇 어색하다. 그리고 ‘선언’에는 불온한 기억도 배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 유장한 레토릭을 “하나의 유령이 세계에 출몰하고 있다. 반자본주의라는 유령이”로 바꾸면 대강 감이 잡힐지 모르겠다. 책의 내용이나 장절(章節) 배열로 보아 19세기 ‘공산당 선언’의 21세기 판을 흉내낸 것이라고 해도 크게 과장이 아니리라.

소련, 서구 좌파, 반자본주의는 본래 한편이었다. 그 ‘혈맹’이 깨진 계기는 무엇보다도 스탈린주의의 발호며, 그리고 그 토양에서 자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다. 자고로 좌파들은 스탈린주의 탈색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구하려고’했다. 소련 붕괴로 소기의 목적은 이루었으나 예상 외의 부담이 뒤따랐다. 반자본주의 투쟁이 약화되고 좌파 간의 결속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반자본주의 대열에는 ① 반동적인 반자본주의, ② 부르주아적 반자본주의, ③ 지역주의적 반자본주의, ④ 개량주의적 반자본주의, ⑤ 자율주의적 반자본주의, ⑥ 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가 늘어섰다.

반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잡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동’과 ‘부르주아’까지 내세우는 것은 너무 심하다. 하기는 마르크스도 ‘반동적 사회주의’니 ‘부르주아 사회주의’니 하며 악의 축과(?) 선의 축을(!) 조립한 적이 있다. 파시스트가 세계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반동적 반대라면, 대기업이 자본주의의 탈선을―자본주의가 아니고―교정하기 위해 시민 단체와 협력하는 경우가 부르주아적 반대의 사례가 된다. 저자의 기대는 물론 사회주의적 반대에 걸렸으며, 촘스키와 부르디외한테 특별히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오직 사회주의로써”(118쪽). 이런 구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이 반자본주의의 지배적 견해는 아니라고 저자는 솔직히 인정한다. 지배적 견해로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이리라.

트로츠키주의는 출세를 마땅찮게 여긴다. 출세도 하고 혁명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일까. 그런데 캘리니코스는 트로츠키주의자이고 ‘출세한’ 대학 교수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품은 한을 생각하면, 트로츠키주의자가 사부를 배반한 소련에 취할 태도는 아주 뻔하다. 소련이 망한 이제야말로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로써 자본주의와 진검 승부를 벌일 때라는 것이다. 때로는 트로츠키주의자답게, 때로는 교수답게 그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승리의 길을 도도하게 설파한다.

먼저 트로츠키주의자답게 저자는 개량과 혁명의 구별을 당부한다. 채찍과 당근이 당나귀 부리는 수단이듯 ‘억압과 통합’은 지배 권력이 피치자의 불만을 다스리는 수단이다. 억압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통합이란 미끼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국고 보조를 더 많이 타내고 기업 기부를 더 많이 얻으려고 시민 단체들이 “멜로드라마 같은 미디어 전략”(121쪽)을 앞세워 죽기 살기 경쟁을 벌이며, 알게 모르게 지배 질서와 한통속이 된다. 그래서 “계급이 끝났다는 믿음은 항상 오류였으며, 이제는 그 믿음을 완전히 매장할 때”(131쪽)라고 언성을 높인다.

그리고 교수답게 ‘다른 세계’로의 이행 전략을 차분하게 설명한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세계가 미쳐가고 있다고…이제 신자유주의를 처방이 아닌 질병으로 생각한다”(42쪽). 이견이야 있겠지만 신중히 들어둘 말이다. “거대한 반자본주의 저항 운동의 표출은 실제로 매력적이지만, 그것은 이기주의의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위험한 형태의 개인주의의 과시가 될 수 있다”(137쪽). 이런 반성과 겸손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판에 하필이면 이런 책이냐고? 열(熱)에는 냉(冷)으로! 대안 제시에 앞서 저자는 “시장 경제의 어떤 변종이 정의, 효율성,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지”(155쪽)를 묻는다. 시장은 아무리 ‘인간화해도’ 이 네 가지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므로 ‘민주적 계획’이 필요하다는 그의 설득은 얼마나 강하고 또 부드러운가. 한동안 세상은 우파가 만드는 역사에 정신이 없었다. 좌파의 역사 읽기를 통해서 세계화 북새통을 ‘냉하게’ 들여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정운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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