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의 힘 ① 나만의 기술, 세계 시장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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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희망의 싹을 확인했다’. 지난 1분기 기업들의 실적 발표 때 증시 전문가들이 보인 공통된 반응이었다. 연초의 암울한 전망을 뒤집은 ‘깜짝 실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 덕에 국내 주가지수는 급등했다. 이게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와 같은 대표 기업들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전문가들은 여기저기서 자라난 희망의 싹을 주목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나름의 기술력으로 시장을 차근차근 장악해 가는 기업들 말이다.

“우리 기술로 만든 스판덱스 제품을 사겠다고 해외 바이어들이 줄 서 있을 정도입니다.”

효성 스판덱스 사업부문의 이창황 사장의 말이다. 경북 구미의 효성 공장 설비가동률은 미국발 금융위기에 휩싸였던 지난해 말 한때 50%대까지 떨어졌으나 현재는 24시간 풀가동 중이다. 미국 인비스타의 ‘라이크라’와 효성의 ‘크레오라’는 스판덱스 세계 시장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 중이다. 그런데 올 들어 글로벌 시장 수요가 늘어나면서 주문은 효성부터 몰리기 시작했다. 이 사장은 “현재 라이크라가 시장 점유율 세계 1위지만 올해 안에 우리가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며 “1998년 스판덱스를 생산하는 공정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하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꿨을 것”이라고 말했다.

효성이 98년 독자기술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조석래 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독자기술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라이선스 계약으로 기술을 들여올 경우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효성은 공정기술을 앞세워 세계 곳곳에 공장을 짓고, 제조원가를 크게 낮췄다. 이런 기술력은 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시작된 지난해 사상 최대인 6조9257억원의 매출과 4401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푸르덴셜투자증권의 이준규 애널리스트는 “중공업·화학·섬유·산업재 등 기술력을 자랑하는 4개 사업부문 실적이 모두 좋다”며 “특히 해외 전력설비 교체주기와 맞물려 2분기부터는 중공업부문의 수익성이 크게 좋아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주가도 올 들어 급등했다. 연초 4만1000원에서 30일 현재 9만3400원으로 올랐다. 코스피지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7년 11월보다 높다.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더 빨리 회복하는 비결은 뭘까. 원화가치 하락 등 외부 요인을 거론하는 분석도 있지만 효성과 같은 독자 기술력이 핵심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미약품도 마찬가지다. 경기도 화성 연구소는 다국적 제약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개발된 개량 신약들이 다국적 제약사들의 오리지널 신약을 시장에서 잇따라 밀어냈기 때문이다. 제네릭(복제약)이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신약을 그대로 베낀 약이라면, 개량 신약은 신약의 일부를 바꾼 형태라 특허가 만료되지 않더라도 판매가 가능하다. 따라서 다국적 제약사들이 한미약품과 손을 잡자며 이른바 ‘적과의 동침’을 제안했다. 한미약품은 머크 한국법인인 한국MSD와 고혈압 치료 복합 개량 신약 ‘아모잘탄’ 공동마케팅을 한다. 국산 약을 다국적 제약사가 파는 첫 사례다. 이 회사의 임성기 회장은 “연구개발은 제약회사에 생명이라 지난해 매출의 10.2%(567억원)를 투입했다”고 말했다.

코오롱도 신기술을 앞세워 경기 침체기를 극복하고 있다. 코오롱은 탄소나노튜브 분야에 역점을 뒀다. 태양전지와 수소저장탱크, 반도체 등 미래 전자산업의 핵심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2012년에 약 1조원의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과 공동으로 탄소나노튜브 복합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해 NASA로부터 해외 업체로는 처음으로 ‘윗컴 앤 홀로웨이 기술이전상’을 받았다.

이희성·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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