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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미국과 일본의 차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역시 미국은 강한 나라다. " 주한 일본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 A씨는 최근 추락일변도의 엔화가 급반등하자 이같이 말했다.

일본 정부가 아무리 용을 써도 꼼짝 않던 엔화약세가 미국의 개입선언에 즉각 강세로 돌아선데 대한 코멘트다.

엔저 (低) 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경기후퇴, 불량채권을 다량 안은 부실금융기관, 초저금리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엔화 급락은 이를 부추긴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의 '일본 길들이기' 발언에 영향을 받은 바도 크다.

지난달 24일 "일본 경제의 재생을 위해서라면 달러당 1백50엔의 엔약세도 용인할 수 있다" 는 루빈 장관의 발언이 보도되면서 엔화는 곧바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들어섰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16일 (현지시간) 엔저를 방관 내지 부추기던 그동안의 태도를 바꿔 외환시장 개입을 선언했다.

더 이상 엔저를 방치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지나친 엔저는 중국 위안 (元) 화의 평가절하와 아시아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 4월9일 외환시장에서 4백억달러 규모의 방대한 개입을 했지만 엔화 방어에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날 겨우 20억달러 규모의 개입만으로 엔화가치를 수직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엔저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표현에 대한 외환시장의 반응이다.

일본 경제가 좋아지거나 개입 규모가 방대하지도 않은데 엔화가 급등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미국은 이제 좀 과장해 표현하자면 무소불위 (無所不爲) 다.

옛 소련 붕괴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경제마저 공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모든 나라에 글로벌 스탠더드 (국제적 표준) 를 강요하고 있다.

사실 미국이 요구하는 투명성.자유경쟁.자유화 등은 자유시장경제에서 궁극적으로 따라야 할 시스템이긴 하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이 장사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자는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몇몇 나라가 미국에 저항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일본은 제조업의 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맞서봤다.

80년대까지는 잘 나갔다.

그러나 뼈를 깎는 구조개혁으로 체력을 비축한 뒤 지식산업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우고 달려오는 미국에 지금 힘없이 나가 떨어지고 있다.

A씨는 "일본은 88년7월 중앙은행 총재회담에서 국제결제은행 (BIS) 비율 8%를 지키기로 합의했을 때 이미 오늘을 예견했어야 했다" 고 아쉬워했다.

거품경제로 불량채권을 다량 안은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BIS 비율을 지키려다보니 시중에 돈이 마르고 개인소비가 감소돼 오늘날의 장기 경기후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은 아시아기금 창설을 주창했다가 미국의 반대로 주저앉았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 (IMF) 의 힘이 약해지고 아시아 국가들의 이른바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속내는 엔화 경제권의 대두를 막기 위해서다.

일본은 미국의 지시에 찍소리 못하고 따랐다.

지난해 한국이 IMF에 가기전 일본은행에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것도 미국의 반대 때문이었다. 미국은 또 일본 다루기에도 아주 능숙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외압 (外壓)에 약한 나라다.

좀처럼 스스로 개방을 하거나 개혁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결단을 내리지 않는 일본 특유의 모호한 정치.경제 시스템 때문이다. 16조6천억엔에 이르는 일본의 대규모 종합경기대책도 미국이 외압을 통해 끌어낸 것이다.

아시아 위기에 대한 미국의 음모설을 들먹이며 "일본이 앞장서 이를 분쇄할 생각은 없는가" 라고 A씨에게 넌지시 떠보자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일본은 미국이 참여하고 동의하는 선에서만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 - ." 일본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이다.

이석구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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